뛰어난 문학성으로 비평의 대상이 되는 시나 소설과 같은 창작물이 아니라도 삶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시선과 태도가 잔잔하게 스며있는 산문이 오히려 큰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 글이 소설처럼 허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진솔함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와 소설과 같이 형식의 제약과 문학적 장치가 없는 자유로움이 그 글을 읽는 독자의 빠른 감응을 이끌어내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전에는 수필이라는 이들 산문을 시, 소설 등의 문학 작품에 비해 가치를 폄하하고, 심지어는 잡문으로 취급, 산문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말하는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산문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장되고, 자신의 창작 활동에 병행하여 산문집을 출간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이 많아졌다.
시중에 나왔던 많은 산문집 중에서도 오래 잊지 않고 꺼내 읽게 되는 것으로 '조금만 가난해도 좋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2001년에 나왔던 책으로 '화가 최용건의 진동리 일기'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최용건이라는 화가가 강원도 인제의 진동계곡을 터전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느끼는 감동을 기록한 산문집이다. 그렇다고 한 화가의 속 편한 전원생활이 소재가 된 책은 아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오지를 택해 정착한 곳이 진동계곡이었다. 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호인 천전(天田)을 따라 이름 붙인 '하늘밭 화실'에서 그림 그리고 농사짓고 민박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작가 부부가 딱 생활할만큼만 농사를 짓고 있으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에서 작가가 느끼는 축복 같은 감동이 아름답게 전해 오는 책이다.
"진동리의 새벽은 때로는 박수를 치며, 때로는 언 땅을 구르며 그렇게 태백산맥으로부터 단숨에 달려 내려온다. 산간 독립가옥의 영창에 하나씩 둘씩 불이 켜지면 밤새워 하늘밭 화실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놀던 별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징검다리를 건너 달아난다.
개천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진 별들은 방태천의 열목어가 되고, 꺽지가 된다. 그리고 봄이 오면 들녘에 앉아 솜양지꽃이 되기도 하고, 오랑캐꽃이 되기도 한다."
낮에 다시 읽었던 이 책의 일부분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감흥이다.
진동리는 최용건 화백으로 인해 유명세를 타 예전만큼의 호젓함은 줄어들었고, 하늘밭 화실도 양옥으로 새로 지어 이 산문집에서 확인하는 단출한 산골 생활의 멋스러움도 이젠 덜할 것이다. 다만 책을 통해 단출한 산골 생활의 감흥과 행복에 동참할 따름이다.
최용건 화백의 산문집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의 기록이라면, 소설을 쓰는 한지혜 작가의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나의 살던 골목에는'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작가의 가난했던 성장기의 기록이다.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이 작가가 성장하고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의 내용이지만 작가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워낙 인상적이었고, 작가가 된 이후의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는 가난했던, 그러나 따뜻했던 어린 날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장의 기록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싶다.
작가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가난은 개천이 흐르는 곳에 지어진 이른바 '다리 밑 집'에서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쌀독에 쌀이 떨어졌던 날,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을 둥그런 등으로 받아내며 마당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울던 엄마의 모습, 옆방 노부부가 내놓은 상에 차려진 음식을 집어먹다가 몹시 써서 퉤퉤 침을 뱉었는데 다음날 그 방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그 이후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전날 몰래 집어먹은 쓰디쓴 음식 맛이 혀끝에 올라오던 기억 같은 것들."이 책의 시작부터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기억이다.
작가는 어린 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드러내고 자랑할 기억도 아니지만 숨기고 어둠 속에 간직할 기억도 아닌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작가의 균형 감각은 현재의 작가의 모습에서 자신이 "개천에서 난 용"까지는 못되었지만 그 시절을 돌아볼 때 잘 살아왔다는 자기 긍정에 이른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지점에서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가난을 결코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타인을 보듬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가난했던 경험이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경험으로 해서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기 극복의 인식이라고 하겠다.
두 권의 책 모두 읽은 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두 책의 인상은 모두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한지혜 작가의 산문집을 접한 것이 2년 전이지만 근래에 읽은 산문집으로 가장 공감했던 책이다.
두 책에서 말하는 가난의 결은 많이 다르다. 작가의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일 것이다. 그러나 두 권의 산문집을 읽고 찾게 되는 공통점은 가난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욕심을 비우고 자연을 찾아간 최용건 화백이 자연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자연 속에서 겸허해지는 사람의 모습이다.
또한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 이것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겸허해질 수 있는 성숙된 모습이다.
가난이 때때로 삶을 불편하고 힘들게도 만들지만 시간이 흘러 가난이 아름다운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와 같은 삶의 굴곡이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물질의 부족이 우리를 비굴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마음에 이르게 한다면 세상이 온통 아름다우리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