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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Jan 06. 2022

단선율 성가, 서양음악의 초석이 되다

- 새롭게 읽는 서양음악사(2)


중세시대는 과연 암흑의 시대였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의 역사에서 중세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중세시대(The Middle Age)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어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의 인문 정신의 암흑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세라고 하면 먼저 기독교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기독교는 봉건제와 함께 중세시대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세시대는 대부분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권과 속권이 갈등하던 시대였으며, 교황권이 절대 권력으로 자리 잡았던 시기는 천년 동안 지속된 중세의 역사에 있어서는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백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또한 르네상스인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자들도 중세시대를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이에 있는 단절의 역사로 파악했지만 연속성을 가진 역사에서 단절의 상정이 무의미한 것으로 중세의 축적된 문화 역량이 르네상스로 나타났다는 시각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가 이탈리아라는 유럽 남부에서 태동한 지역 양식이었다는 점에서 중세 문화와 공존한 르네상스를 포괄적으로 중세에 포함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록 그 발전이 더디게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문화의 발전이 중세시대에 이루어졌었다. 특히 음악에 있어서 중세시대가 이루어낸 역량은 오히려 다른 시대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주로 수도원에서 형성된 중세의 교육제도에 있어서 수사학, 변증법, 문법의 기초 3 학과에 이어, 음악은 산수, 기하, 천문과 함께 4 학과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음악의 지위가 음악 발전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서양 음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중세의 음악이 다른 문화권이나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와 같이 음악이 종교적인 제례 의식의 본질적인 면을 담당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전례를 장식하는, 부수적인 요소였다는 점이 오히려 음악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음악이 종교의식의 본질적인 면을 가졌다면 종교적 행위로써 음악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변화를 가져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세시대는 르네상스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암흑에 갇힌 시대는 아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성가의 통합


 중세 유럽을 형성한 중심의 하나인 기독교의 변천과 이를 통한 교권의 확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교황 수위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것이 중세의 단선율 성가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탄생과 무관치 않기에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초대 교회는 대주교가 관장하는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로마 교구 등 5곳의 총대 교구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교권이라는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로마 교회의 교황도 다른 총대 교구와 마찬가지로 대주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5대 총대 교구 중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속했던 유일한 교구였던 로마 교구는 사라진 서로마 제국을 대신해 행정관처럼 속권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권과 속권까지를 아우르는 권력이 필요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 강력한 교황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구실이 된 것이 '교황 수위권'이었다. '교황 수위권'은 베드로의 권위가 로마 교회로 계승되었으므로 로마교회의 주교, 즉 교황이 기독교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로마 교구가 유일한 라틴지역 교구라는 점, 서로마 제국 몰락 이후의 상황, 즉 무너진 질서를 교회가 세워야 한다는 점과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간섭(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속권과 교권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을 견제할 권력이 필요했다는 점 등이 로마 교회의 주교가 기독교의 수장, 즉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와 이 시기의 중세 교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었고, 유럽 역사의 바깥으로 분리된 동방 정교회가 초대 교회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반면,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기독교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세시대에 있어 교황제 확립의 역사는 바로 가톨릭 교회의 헤게모니 형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황권은 서로마 제국 폐망기의 위기를 수습한 레오 1세를 거쳐 그레고리오 1세에 이르러 세속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중앙집권적인 교황권을 확립, 유럽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력한 교권의 확보한 다음에는 교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한 전례의 통일 작업이 뒤따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례에 있어 음악적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가의 통합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의 가톨릭 성가는 로마 교회의 성가를 비롯,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가, 스페인 지역의 모자라베 성가, 프랑스 지역의 갈리아 성가 등 지역마다 상이한 성가가 불리어지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들 성가를 취합, 교회력에 따라 정리하여 '안티포나리움'이라는 한 권의 성가집을 편찬했으며, 이 책에 수록된 성가를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성가를 편찬하고 있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과 기보법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란 그레고리오 1세의 뜻에 따라 편찬된 성가를 뜻한다. 거의 대부분 기존에 있었던 성가를 집대성한 것이겠지만 새로 성가집에 수록된 곡도 있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일부 곡에 대하여 교황이 직접 작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수도원의 수사 출신이었다. 수도원의 수사에게는 성가를 부르는 일이 일상이었고, 그들에 의해 성가가 새로 작곡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1세가 성가를 작곡했다는 주장이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증할 근거는 없다.

 중세 초기의 음악이 창조적 의욕보다는 예배와 같은 종교의 전례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 작곡되었기에 미술과 마찬가지로 창작을 한 예술가, 즉 작곡자는 중요하지 않아 익명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으로 우선 작곡자의 익명성을 들 수 있겠다.

 둘째로 그레고리오 성가는 전례를 위한 음악이니만큼 유대교 회당에서 불리던 시편창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시편창은 입당송, 봉헌송, 영성체송과 같이 행렬 때 불렀던 교송(Antiphona)와 성서 봉독 후 부르는 응답송(Responsorium)이 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8개의 교회선법 체계로 이루어진  단선율 성가이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단선율(Monopholy)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아직 다성(Polyphony) 음악이 도래하기 전이니 당연한 사실이다. 다만 교회선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선법(Modus)이란 훗날 바로크 시대에서 장단조 체계가 확립되기 전까지 음악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되어온 것으로 그 유래가 그리스 선법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선법은 4개의 정격 선법과 4개의 격 선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다른 시작음과 종지음으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음악이겠지만 시편창의 가사 내용에 따른 리듬의 미세한 변화가 단순함 속에서 다양성을 찾아낸다. 그리고 8개의 교회 선법은 그레고리오 1세 당시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서서히 완성된 것이다.

중세시대에 사용된 8개의 교회선법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9세기에 이르러 네우마(Neuma)라는 기보법으로 표기되었다.

 중세에 들어 기보법의 발달은 앞서 언급한 정치적 이유 외에도 성가가 늘어남에 따라 암기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에 따라 음의 상승, 하강 만을 표시하여 정확한 음가를 표시할 수 없었던 고대의 기보법을 보완한 네우마를 창안, 정확한 음가와 시작음의 표기가 가능해졌다.

네우마 기보를 사용한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네우마는 오늘날 사용하는 음표의 원형이었으며, 이탈리아 아레초의 수도사이자 음악 이론가인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 아레초의 귀도)에 의해 4 선보(현재 사용하는 5 선보의 원형)가 창안되어 계명창이 가능케 되었다.

 귀도 다레초(995~1050년)는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역 아레초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사이면서 서양음악사에 실명이 거론되는 최초의 음악 이론가이다.
 음악 이론서인 '미크롤로구스'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선보(線譜)를 창안, 지금의 5 선보의 원형인 4 선보를 사용했다.
 또한 잘 알려진 노래인 성 요한 세례자 축일 찬미가인 'Ut queant laxis'에서 ut, re, mi, fa, sol, la 등 헥사코드, 즉 6음 음계의 이름을 정했다. 이는 17세기에 이르러 si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7음 음계를 완성하고, 발음 상의 이유로 ut는 do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계명창의 원리가 된 '성 요한 세례자 찬미가'

 끝으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리듬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하면 그레고리오 성가는 우리의 심장 박동과 다르지 않아 자연스럽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리듬을 특히 '자유 리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익투스(Ictus)라는 강세 리듬을 두어 음악에 생동감을 준다.

 이런 특징으로 해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특유의 단순하면서 평온한 분위기의 전례에 적합한 음악으로 탄생했다.(감상의 예 2-1)


 적지 않은 수의 음반을 통해 전문가가 아닌 일반 애호가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지만 기존의 음악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독특한 인물이 단선율 성가의 시대를 장식한다.
 아마도 서양 음악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작곡가일 이 사람은 여성으로서 독일의 빙엔 수녀원 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년)이다. 이 여성은 수녀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었으며 작곡가, 의사, 철학자, 예언가였으며 신학과 식물학, 의학에 관한 서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기도 중 몰입된 상태에서 예언이 가능했으며, 예언의 내용을 시로, 음악으로 남겼다. 또한 그녀가 작곡한 도덕적 내용의 전례극(중세에 유행하다 14세기에 소멸한 종교적 내용을 가진 일종의 음악극)인 '오르도 비르투툼(Ordo Virtutum)'에 대하여 오페라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반적인 그레고리오 성가가 지적이며 정적인 음악이라면 힐데가르트의 성가는 보다 감성적이고 몽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감상의 예 2-2)
 어쨌든 서양 음악사에 있어 최초로 등장하는 작곡가라는 사실, 특히 그 인물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2012년에 성녀로 시성되었다.









감상의 예 2-1)

 그레고리오 성가'알렐루야(Alleluia)'.

 "알 렐 루~ 야~~~"와 같이 한 음절을 여러 음정으로 나누어 장식적으로 사용하는 음표를 '멜리스마'라고 하는데 멜리스마의 무분별한 사용을 금하기 위한 통제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 탄생의 한 요인이었다.

https://youtu.be/j6VYnTYNtBA


감상의 예 2-2)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성가 '훌륭하도다, 고귀한 장미여(Ave Generosa)'.

https://youtu.be/Lbg4TSP44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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