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생명의 소리가 아쉽다

by 밤과 꿈

코로나로 각급 학교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교육이 이루어진 지 오래되었다. 다행히 이달부터 학교는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고 배움의 열정으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산자락에 있는 초등학교도 넘쳐나는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모처럼 생기가 넘친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밝게 반짝이는 봄햇살을 닮았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곧 생명의 소리다. 어리다는 것, 그것은 앞으로도 오래 생명 안에서 머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의 시간, 곧 삶은 순간순간이 모두 축복이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 순간이 축복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간을 따라 쌓여가는 삶의 경험들이 간단치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단치 않은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어린 때를 떠올린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만약에 본향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관념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고향인 어린 시절이 될 것이다. 그 시절이 아무리 슬픔과 고난이 점철된 기억으로 남아있더라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에서 케인으로 분한 오손 웰스(Orson Welles)가 쓰러져 생명이 다할 때 마지막으로 한 말에 대하여 언론의 궁금증이 증가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그것이 어린 시절 케인이 가족의 곁을 떠날 때 빼앗겼던 썰매인 '로즈버드(Rosebud)'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케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함께 했던,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의 상실을 상징하는 대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즈버드는 한 남자가 되찾으려고 추구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안도감과 희망, 순수함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 케인이 떠올린 생명의 표상이기도 하다.


산자락 길을 걷다 만나는 초등학교의 모습이 정겹다. 주말이라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아이들의 활기 가득한 재잘거림도 들리지 않지만 초등학교는 그 모습 만으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겨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초등학교가 지닌 활력이 옛 국민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의 기억 속의 활력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우선 학생의 수가 기가 찰 정도로 줄어 서울과 같이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서도 한 학년에 1~2 학급만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식을 낳아 제대로 뒷받침을 해서 키우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를 일방적으로 탓할 문제도 아니다. 또 한 가지, 아이들이 마음껏 가진 생명의 기운을 발산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어릴 때부터 사회적 성공을 위한 경쟁을 배워가는 우리 아이들은 생명력을 발산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있다. 요즘의 아이들은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축구와 같은 스포츠조차 수업을 파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자유롭게 뛰어노는 수준이 아니라, 유소년 축구교실 같은 곳에서 체계적으로 스포츠를 배우고 익힌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는 수업이 모두 끝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오랜 시간을 학교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에게는 스포츠 또한 학원이나 방과 후 학교에서 배우는 강좌의 하나일 뿐이다. 혹시나 자신의 자녀가 뛰어난 운동선수가 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작용한.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고, 나 자신도 스스로 사역의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10년 정도의 시간을 교회에서 지역민을 위한 문화 선교의 분야에서 봉사를 했었다. 의욕을 가지고 성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와 함께 어린이 강좌를 개설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방과 후 학교와 같은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호응도가 좋았고, 더불어 지역민들이 교회에 새 신자로 등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방과 후 학교가 개설되어 교육부의 막대한 예산 지원에 비해 경쟁력을 상실한 교회의 어린이 강좌는 그 인기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수익 사업이 아니었기에 그 점은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는 토요일(교회의 강좌가 토요일에 개설되었다) 마저 아이들에게 배움을 연장시키는,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 교회가 할 일인가, 라는 자괴감이었다. 그래도 교회에서 무료로 시작해서 강좌의 수준을 올리면서 강사료도 안 되는 실비의 수강료를 학부모가 부담했었기에 가정 형편에 따라 해마다 교회의 강좌를 수강하는 아이들이 있어 강좌를 단번에 폐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심 끝에 기존의 단품 강좌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면서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 잔치마당'이란 이름의 프로그램을 기획했었다. 야심 차게 기획한 일이었기에 교회학교, 그리고 남녀 신도회의 협조와 자원봉사 , 교인들의 후원 등 교회 전체의 행사로 진행하여 중복된 인원이 있겠지만 중소 규모의 교회 행사로서는 동원이 쉽지 않은 천여 명의 학부모와 아이들이 참여,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놀고, 먹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경험이 있다. 일 년 후에 다시 행사를 준비하던 중 코로나로 인해 무산되어 여태껏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그렇게 교회에서 10여 년 동안 지역민을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유지, 진행하면서 자녀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급적 많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 정도가 심하기에 언급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인데도 이곳저곳의 강좌에 대한 정보를 취합,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각종 강좌를 듣게 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이가 만능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녀가 듣는 강좌의 선택이 전적으로 자녀의 선택이 아니라 학부모의 기호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아이에게 강좌를 수강케 했다가 아이가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 가지로는 학부모들은 이이들이 수강하는 강좌의 결과물이 있는 경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들기와 같은 미술 영역의 강좌를 선호하고 특히 요리교실에 대한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올바른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학부모들이 자녀의 교육 성과에 대하여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워낙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지라 교육 여건 또한 내 경험과는 달리 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짐작컨대 우리 아이들이 자신에게 내재된 생명력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는 여건은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성공이라는 왜곡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한 요원한 일이다.

산자락 길에 있는 초등학교를 지나가면서 해보는 생각이다. 모쪼록 토요일이 아닌 평일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넘쳐나서 내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