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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Jul 31. 2022

베토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가교

- 새롭게 읽는 서양 음악사(12)


변화하는 시대에 서서


 우리는 중등 교과과정에서 빈 고전파 혹은 고전주의 음악에 대하여 배우면서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고전주의의 3대 작곡가라고 인식하게 된다.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때 베토벤은 자신의 선배들과는 다른 시대,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서서히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선배들과는 다른 창작 여건을 향유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에서 느끼는 특성, 즉  ‘고뇌를 극복하는 환희’와 같은 이미지는 베토벤의 질병과 관련한 개인적인 삶과 관련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그의 음악이 가지는 선진성과 독창성은 베토벤에게 내재된 자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 당시로서는 충분히 전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음악은 음악 애호가들의 후원으로 선택된 베토벤에게 요구된 것으로, 보다 근원적으로는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런 요구에 의해 베토벤은 독일 북서부 베스트팔렌의 작은 도시 본에서 유럽의 최강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 왕국의 수도 빈으로 가게 되었다.


준비된 도시, 빈을 향하여


 1792년 가을에 베토벤이 빈에 정착하게 된 것에는 빈의 음악계에 영향력을 지닌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판 슈비텐 남작은 외교관으로서 런던, 베를린 등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특히 베를린에서 근무할 때 베를린 악파의 진지한 음악 경향을 인상적으로 경험한 듯하다. 이때 판 슈비텐 남작은 젊은 베토벤의 재능을 확인했거나 최소한 소문으로라도 전해 들었을 개연성이 크다. 베토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가 본의 궁정 음악가로서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성장하고 명성을 쌓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본이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력 안에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에까지 베토벤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해도 터무니없는 가정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할 때 알게 된 베토벤의 재능을 잊지 않았던 판 슈비텐 남작이 베토벤을 빈으로 초청,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하게 했다. 이는 남겨진 빈에서의 기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변화와 베토벤에 대한 후원


 베토벤이 빈에 정착한 이후 10년 간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판 슈비텐 남작은 베를린에서 경험한 ‘진지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빈의 음악적 체질을 바꾼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판 슈비텐 남작은 1786년에 빈 최초의 사교적 음악 모임인 GAC를 주도적으로 조직, ‘살롱 포럼’ 형식의 대중적인 음악회를 음악 소비의 새로운 방안으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음악의 수용 방식에 있어 변화를 가져온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궁정악단의 쇠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궁정악단을 따라 사적 악단을 조직하고 있었던 귀족들의 악단마저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개인적인 음악 수용 방식이 쇠퇴한 반면, ‘살롱 포럼’ 방식이 등장하여 공동으로 하는 음악 후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나아가서 귀족에게 얽매이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와 대중 음악회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악 수용 방식의 변화에는 빈의 사회 계층 구조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절대 왕권을 지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세습 귀족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든 반면, 새롭게 작위를 받은 신흥 귀족과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개선되어 왕족과 세습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화의 향유를 새로운 포럼의 형태로 누리고자 한 것이었다. 판 슈비텐 남작 또한 신흥 귀족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빈에서는 GAC 외에도 여러 음악 포럼이 등장하여 경쟁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런 경쟁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부합하여 빈으로 초청된 음악가가 바로 베토벤이었다.


젊은 날의 베토벤


위대한, 혹은 악성 베토벤의 탄생


 베토벤의 활동 당시에 그의 음악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음악이 담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라는 함의를 누구나 이해하지만 베토벤의 생존 당시에 그의 음악은 전위적이고 난해한 것이었다.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을 ‘혁신적’이란 의미로 이해하지만 그의 음악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는 그의 음악을 선배인 하이든,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교해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대중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베토벤의 후원자들이었던 귀족들의 기호가 새롭고 위대한 음악이었던 만큼 그들은 적어도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8세기 말~19세기 초 귀족들의 음악에 대한 집착을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보다 성능 좋은 자동차에 집착하듯 그 시대에는 경쟁적으로 새롭고 보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음악에 집착했을 것이다.

 물론 음악에 나타난 베토벤의 뛰어난 재능과 인간성이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서양 음악사에서 베토벤이 가지는 명성의 크기는 베토벤을 후원한 귀족 계층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베토벤의 위대함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악성’으로 추앙받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었다.

 우리는 베토벤이 말년에 병마와 함께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귀족 계층의 몰락으로 베토벤에 대한 후원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음악 포럼의 쇠퇴와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 연주회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헝가리의 예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베토벤을 일컬어 음악사적으로 ‘최초의 독립적인 음악가’로 언급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음악가에 대한 후원 방식이 사라진 낭만주의 시대의 슈베르트에게 보다 합당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고전주의 시대의 전성기에서 형식적으로는 고전 양식을 완성했으면서 낭만주의 시대의 이상을 음악에 담아낸 베토벤을 일컬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가교를 놓은 음악가로 음악사적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 인생의 고백


 지금까지 베토벤이라는 전도가 유망한 젊은 음악가의 재능이 위대한 예술을 형성하게 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소 장황하게 이에 대하여 기술한 이유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파르게 진행되는 격변기였고, 예술 또한 당연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영원할 수는 있지만 시대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할 따름이다. 베토벤의 음악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기에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음악가에 대해 사회사적 측면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이해의 핵심은 그의 음악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의 음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베토벤의 전기가 아니기에 베토벤이 자신의 개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시기부터 대표적인 작품을 간략하게 언급하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초인 1803~4년에 들어서 베토벤의 개성이 명확하게 나타난 음악들이 연이어 작곡된다. 먼저 1903년에 작곡을 시작한 영웅 교향곡이 1904년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3곡의 피아노 소나타, 즉 21번 ‘발트슈타인과 22번, 그리고 23번 ‘열정’이 작곡되었다. (감상의 예 12-1)

 영웅 교향곡은 베토벤의 음악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던 곡이었다. 작곡이 완성된 1년 뒤인 1805년에 가진 공개 연주회에서 청중이 받은 인상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물론 베토벤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은 이 걸작 교향곡에 찬사를 보냈지만 일반 청중들은 우선 기존의 고전주의 교향곡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늘어난 음악의 길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기괴하게 느껴졌을 이 교향곡의 길이와 화성의 진행을 음악학자 앤소니 홉킨즈는 청중에게는 ‘음악적인 지진’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작곡이 이루어졌다면,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에 이르러서 대중의 취향에 따르지 않고 비로소 작곡자의 창작 의도와 욕구를 전적으로 반영한 작곡이 이루어진 최초의 작품이 영웅 교향곡이라는 것을 뜻한다.

 베토벤에게 있어 창작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는 비록 다른 걸작에 가려진 오페라 ‘피델리오’가 작곡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그렇지만 공연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면 오페라는 베토벤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르인 모양이다.


 1806년에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곡들이 작곡에 들어간다. 그것은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의뢰로 작곡된 3곡의 현악사중주곡으로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라고 일컫는 7~9번의 현악사중주곡들이다. 현악사중주라는 장르는 이 세 곡에 이르러 단순한 아취 음악에서 벗어나 진지함을 갖추게 된다. 비로소 현악사중주는 교향곡, 협주곡과 함께 향후 기악 음악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청각을 잃어가던 1808년에는 전원 교향곡과 5번 교향곡을 완성했고, 피아노 협주곡 4번과 합창 환상곡과 같은 피아노와 관현악이 함께 하는 곡들을 작곡,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로 연주회장에서 연주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이는 베토벤의 청력 상실이 돌이키기 힘들 만큼 진행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이후로 베토벤이 하는 실제 연주회장에서의 피아노 연주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감상의 예 12-2)


하일리겐슈타트의 숲을 산책하는 베토벤


 원숙기에 접어든 베토벤은 1811년에 교향곡 7번을 완성하고 이어 8번과 9번 교향곡 ‘합창’의 작곡에 착수한다.

1812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완성하여 무대에 올린다. 당당한 악상을 가진 이 곡을 ‘황제’라고 부르면서 지금은 최고의 걸작 협주곡으로 알고 있지만 첫 공연은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감상의 예 12-3)


 베토벤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후원도 끊겨 가는 데다 조카 칼의 후견 문제로 지루한 법정 공방으로 심신이 지쳐 갔다. 더불어 작곡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18년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자 열렬한 후원자로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루돌프 대공의 주교 서품을 기념하여 ‘장엄 미사’를 작곡했다. 이곡은 기악곡에 비해 많지 않은 베토벤의 종교 음악 중에서도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감상의 예 12-4)

 또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영향으로 작곡된 ‘디아벨리 변주곡’, 그리고 베토벤의 후기를 장식하는 피아노 소나타 28~32번이 탄생한다. 이들 후기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나타들, 즉 월광, 비창, 열정과 같은 소나타들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베토벤 말년의 깊은 정신성을 표현한 걸작들이다.(감상의 예 12-5)

 1823년에는 교향곡 9번 ‘합창’이 완성, 베토벤의 지휘로(사실은 다른 지휘자가 있었다.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의 지휘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거장에 대한 예우가 있었다) 초연이 이루어져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감상의 예 12-6)

 합창 교향곡은 인성이 첨가된 최초의 성악 교향곡(베토벤은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앞서 피아노와 관현악, 그리고 합창을 위한 ‘합창 환상곡’에서 시험한 바 있다)으로서, 아다지오 악장의 치밀하고 깊이 있는 표현은 말러의 교향곡을 예시하는 것이다.


 베토벤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천착했던 장르가 현악사중주였다. 당시 베토벤의 일기에는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오직 내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라고 적혀 있다. 12~16번에 이르는 후기의 현악사중주를 들으면 마치 베토벤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음악적으로 못다 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3번 현악사중주곡처럼 모두 7개의 악장으로 구성했다 지나치게 긴 푸가 악장을 독립시켜 6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곡이 있는가 하면,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인 푸가와 함께 15번 현악사중주곡에서는 중세의 교회 선법을 도입하는 등 베토벤의 시도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사중주곡 16번에 이르러서는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에서 감지되는 악상의 단순성이 압축되어 보인다. 게다가 16번 현악사중주곡의 악보에는 4악장에 ‘어려운 결심’이라는 부제를 표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과 같은 문장을 기재, 작곡 당시 베토벤의 심적 갈등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 말년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독립된 푸가를 포함하는 6곡의 현악사중주는 베토벤의 내면을 가장 충실하게 표출하고 있어 베토벤이 음악으로  인생의 고백이라고   있다. 아직도 현악사중주라는 장르에서  곡들만큼 음악적 깊이를 가진 곡이 없어 작곡가에게는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벽으로 생각되는 음악이다. 진정 베토벤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들어야 한다. (감상의  12-7)

 이러한 베토벤의 내적 고백을 지나 서양음악은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든.


베토벤의 의지를 잘 표현한 초상화

 

 

 


감상의 예 12-1)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중 4악장(allegro molto - poco andante - presto)

https://youtu.be/-fldMxekGNg


감상의 예 12-2)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중 2악장 부분.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은 각 악장마다 부제가 달린, 표제성이 강한 음악이다.

 표제음악이라는 용어를 낭만주의 시대에 베를리오즈가 ‘환상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사용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 비발디의 ‘사계’ 또한 표제성을 띤 음악이었지만, 적어도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은 교향곡에 있어서 표제성을 띤 음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 당시 작곡한 이 교향곡에는 자연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감정이 넘쳐흐른다.

https://youtu.be/CuY7u6C2Yio


감상의 예 12-3)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중에서 3악장(rondo, allegro)

https://youtu.be/_jOAv2Xi9xU


감상의 예 12-4) 베토벤의 ‘장엄 미사’ 중 상투스(sanctus).

 장엄하고 아름다운 이 곡의 중간 바이올린 독주부에 대하여 “바이올린을 위해 작곡된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흔히 말한다.

https://youtu.be/lI0jSQCGUrY


감상의 예 12-5)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중 2악장(arietta, 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

 2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에 이르러 베토벤은 지극히 단순화된 악상을 전개한다.

 훗날 이 소나타에 대하여 바그너는 “1악장은 고뇌와 영웅적인 포부를 표상하는 의지를, 그리고 2악장은 고요를 되찾고 이성을 인도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라고 말했다.

https://youtu.be/2HiyWXGZURk


감상의 예 12-6)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 3악장(adagio)

 흔히 합창 교향곡 하면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텍스트로 한 성악이 첨가된 4악장을 떠올리지만, 3악장의 아다지오 악장이 지닌 심원한 아름다움은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https://youtu.be/6Pok0N02RLs


감상의 예 12-7) 베토벤의 현악사중주곡 15번 중 3악장(molto adagio)

 베토벤은 이 곡의 2악장을 작곡한 후 병마로 작곡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기력을 베토벤이 3악장을 작곡하면서 ‘병으로부터 회복된 자가 드리는 리디아 선법에 의한 감사의 기도’라는 다소 장황한 부제를 달았다. 중세 선법으로 작곡된 서주부의 평온한 악상은 한편으로는 기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안간힘도 느껴진다.

https://youtu.be/gumi5pEpO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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