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희의 단편소설 '동경(銅鏡)'
거울 빛의 반사가 잠시, 천장으로 벽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유리컵에 머물고 밖의 빛으로 어둑선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물속에 담긴 틀니만이 홀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밝고 명석하게 반짝거렸다.
- 오정희의 단편소설 ‘동경(銅鏡)‘ 중에서
소설가 오정희의 이름을 요즘 자주 듣게 된다. 새로운 작품 활동을 전하는 소식이라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무슨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했었다는 정치적 스캔들 같은 것이라 듣는 마음이 편치 않다. 사실 문단이라고 하는 곳에서 문학 외적 스캔들은 드물게 만나는 일이다. 어쩌면 흔한 일인데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일제 식민지 시절에 문학인들의 친일행각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시인의 후배 시인에 대한 성추행 사실이 피해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져 망신살이 뻗치기도 했다. 문학과 인간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과 삶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문호일지라도 인간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쓴 시나 소설이 뛰어나다고 해서 인간적인 흠을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그의 흠이 많은 삶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의 문학적 성취마저 폄훼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오정희의 소설을 대부분 읽었다. 오정희의 소설이 보여주는 섬세한 묘사와 감각적인 문장은 소설 쓰기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 오정희의 감각적인 단편소설을 읽고 탄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읽었던 오정희의 단편소설이 ‘동경’이었다.
소설 ‘동경’은 공무원의 정년을 마친 장년의 시점으로 노화와 함께 늘어가는 죽음에 대한 강박과 이에 반비례해서 사라져 가는 생명력에 대한 동경이라는 주제, 즉 상반된 관점을 절묘하게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오정희는 한나절의 일상에서 이 주제를 결합하는데, 이를 위해 오정희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물건을 일상을 구성하는 소재로 등장시키는데 대표적인 것이 거울과 틀니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들뜨기 시작하고 잇몸이 퍼렇게 부풀어 이뿌리가 드러났을 때, 결국 모조리 빼고 틀니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낭패감보다는 심한 배반감과 노여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 위장을 비롯한 몸의 모든 기관이 무력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화자에게서 일어난 이런 신체의 변화에 대하여 의사는 “퇴직 후에 흔히 오는 증상입니다. 갑자기 일손을 놓게 된 데서 오는 허탈감으로 육체도 긴장과 균형을 잃게 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를 뽑고 틀니를 함으로써 화자의 노화를 망하고 있다면, 그의 아내는 “청대처럼 자라던 아들을 죽이고 머리가 온통 세어버렸다.”
일찍 머리카락이 세어버린 아내와는 달리 은퇴 후 흰머리 올이 드러나면서부터 화자는 염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틀니를 한 뒤 그는 희고 빛나는 이와 검고 단정한 머리칼로 더욱 젊어졌다. 가끔 그는 이제 마흔 살이 되었을 영로를 바라보듯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영로는 일찍 화자 부부의 곁을 떠나간 아들이다. 오정희는 노년에 이르러 죽음에 좀 더 다가선 화자와 그의 아내의 상황에 아들 영로의 죽음을 겹쳐 놓음으로써 소설의 구성에 단순하지 않은 층위를 형성한다.
그리고 틀니로 저작(咀嚼)에 불편을 느끼는 화자를 위해 아내는 자주 칼국수를 준비하고 남는 반죽으로 맥과 같은 동물의 형상을 빗곤 한다. 이는 박물관의 토우와 연결되고 더불어 동경, 즉 구리거울을 연상한다.
“영로를 묻었을 때 그는 그가 묻고 돌아선 것이, 미쳐가는 봄빛을 이기지 못해 성급히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가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푸른 녹이 생겨 거울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동경은 꺼져버린 아들 영로의 생명뿐만 아니라 노년에 이르러 생명력의 감퇴와 더불어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강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녹슨 동경이 생명력의 상실을 상징한다면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거울은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재다. 먼저 거울을 사용한 만화경이 등장한다. 이 만화경은 이웃에 사는,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여자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다.
“아내의 발소리가 마루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그는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만화경을 꺼냈다.”
바로 화자가 아이의 만화경을 훔친 것이었다.
“그는 아이의 눈이 되어 아이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화경을 집어 들었다.“
화자가 아이의 만화경을 훔친 행위는 자신에게서 사라져 가는 생명력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어린아이의 설정 또한 생명력의 대비에 효과적으로 보인다.
또 한 번 소설에서 거울이 등장한다. 화자의 아내가 가꾼 화초를 아이가 꺾어 아내에게 야단을 맡는다. 이에 영악한 아이는 “사납게 눈을 치뜨고 아내를 노려보던 아이가 햇빛 환한 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거울을 돌려 아내에게 비추었다.”
아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로 아내의 얼굴을 비추는 아이, 이를 피해 방안으로 빛을 피하는 아내.
“빛은 이제 눈물에 젖은 아내의 조그만 얼굴과 그의 눈시울, 무너진 입가로 쉴 새 없이 번득였다. 그것은 어쩌면 아득한 땅 속에 묻힌 거울 빛의 반사인 듯도 싶었다.”
이렇게 생명을 상징하는 거울의 빛은 생명을 다한 동경의 지난 시간과 닿아 있다. 그리고 짓궂게 장난치는 아이와 아이의 장난에 무방비로 당하는 아내의 모습은 곧 생명력의 차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늙은이를 무력한 공포에 몰아넣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있을까.”
오정희의 소설 ‘동경’은 화자의 시각을 빌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 그리고 화자의 시선은 지속적으로 여자 아이를 관찰하듯 좇는다.
“절기보다 이른 더위 탓인가, 골목에는 사람의 자취가 없어 그는 늘상 다니는 길이면서도 이상한 낯섦에 빠져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마치 관음증과 같이 아이를 따르는 화자의 시선을 화자에게서 사라져 가는 생명력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노인이 가지는 생명에 대한 무력감이 소설의 전부에서 롱테이크의 기법으로 촬영된 영상을 보듯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여름의 찌는 햇살 아래 지치듯 소설이 탄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소설의 구성에 빈틈이 보이지 않는 것에는 오정희라는 작가의 감각적인 묘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내의 흰머리와 앙상하게 굽은 등허리 위로 좀체 기울지 않는 한낮의 정적이 수은처럼 무겁게 얹혀 흐르고 있었다.“
오정희의 소설 ‘동경’에는 작가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단편소설의 교과서와 같은 구성력과 감각적인 묘사가 잘 직조된, 촘촘하고 부드러운 옷감을 대하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의 끝은 거울이 반사한 빛과 틀니를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한다.
“거울 빛의 반사가 잠시, 천장으로 벽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유리컵에 머물고 밖의 빛으로 어둑선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물속에 담긴 틀니만이 홀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밝고 명석하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