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변두리 인생의 애환과 사회 변화

-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浮草)'

by 밤과 꿈
불빛 아래 이정표는 하얗게 서 있었다

-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 중에서


어떤 소설은 첫 문장에서 독자를 사로잡는다. 말하자면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고 소설의 전개를 예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소설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부분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것이다. 인상적인 시작과 마무리는 소설의 성공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소설가가 소설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 소설의 처음과 끝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특히 소설의 첫 문장은 독자에게는 첫인상과 같은 것이라 읽기에 대한 호감과 집중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7년 제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한수산의 장편소설 ‘부초’는 “불빛 아래 이정표는 하얗게 서 있었다”라는 담백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 ‘부초’가 사회 현실의 변두리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곡마단 사람들의 애환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문장은 소설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아쉬울 만큼 이 문장은 감각적으로 소설의 주제를 전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두운 밤 가로등 불빛을 받아 창백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정표의 모습에서 이 문장이 얼마나 질박하게 소설 ‘부초’의 주제를 표명하고 있는가. 우선 밤이라는 점에서 길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 또한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까지 명확한 지침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수산의 감각적인 문장은 주인공인 하명의 공중 그네 타기의 곡예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명이 허공에 몸을 날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이 거꾸로 뒤집혔다가 쏟아지고, 객석은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물보라 같은 공기가 가슴을 막았다. 발끝에서부터 머리칼까지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끝없이 하얀 물보라가 눈앞을 가렸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묘사라고 믿는다. 소설 ‘부초’에서 만나는 한수산의 화려한 미문들에 감탄하게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담백한 첫 문장에서 묘사의 힘을 강하게 느낀다.


한수산은 특히 감성적인 문장으로 1970~80년대 한국 소설에 족적을 남긴 작가이다. 한수산의 소설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아름다움을 도덕적으로 묘사하는 소설가는 많지만, 어름다움 그 자체의 매혹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소설가는 의외로 드물다. 한수산은 문체의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 고통의 아름다움, 소설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보여 주는 한국 소설사의 대표적인 미학주의자이자 유미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가끔은 한수산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단다. 마찬가지로, 미문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반드시 크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유려한 문장을 만나 음미하는 재미를 부정할 수 없다.

한수산은 이러한 문장으로 해서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었던 소설가였다. 그러나 이런 점이 한수산의 작가적 역량을 폄하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만큼 1970~80년대는 소설문학에서 순수와 대중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작동했던 시대였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소설 ‘부초’는 한수산에게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훌륭하게 발휘하도록 한 작품이며, 문단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도록 한 작품이다.


소설 ‘부초’의 줄거리를 좇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편소설의 줄거리이기에 짧은 지면에서 언급하기에는 너무 장황하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곡마단이라는 변두리 인생들의 떠도는 삶의 애환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부초의 독자성은 어느 한 개인, 어느 특수한 사회집단에 국집 되어 있지 않고 우리의 고달픈 인생 여정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로서 폭넓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나아가 섣부른 이념을 덧칠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민중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데 있다”라는 문학평론가 조성면의 언급과 같이 곡마단이라는 특수성에서 보편성 이끌어 낸 작가의 역량이 이 소설의 생명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막 무대로 유랑하는 곡마단의 천막이 불타고 더 이상은 곡마단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사실 이것은 급변하는 우리 사회의 한 국면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에서 하명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소설 ‘부초’는 끝을 맺는다.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디든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면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 테니까.“



이전 18화조르바,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