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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음은 알겠지만, 확신이 없었다

-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더라 2(5)

by 밤과 꿈

변죽만 울리며 H와의 좁혀지지 않는 사이는 방학을 지나면서 더욱 심각해지기 일쑤였다. 그녀의 본심이 어땠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있으면 나는 굳이 그녀를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어도 내가 그다지 실언을 한 것도 없는 듯싶은데 뒤끝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말로 따져 물으면 될 일이었다. 듣고서 수긍이 가는 말이면 바로 내 잘못을 인정했을 것이다. H의 반응이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었기에 나름 힘들었다. 여자와의 문제가 아니라면 나와 다른 생각으로 더 이상 합일점을 찾기 힘들 경우 내가 먼저 대화의 문을 닫아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성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H에게 내 마음을 전한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그날, 나는 학교 정문을 지나 캠퍼스로 올라가고 있었고 H는 정문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야 비를 맞고 있었으니 H가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고, H가 아무리 우산을 눌러썼다고 해서 그녀의 체형과 걸음걸이를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그날 H의 옷차림까지 기억한다. 빨간색 티셔츠에 백바지. 그래도 그냥 멀찍이에서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비까지 내리는 날 길에서 실랑이를 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여름방학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H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가까이에 없었으니 홀가분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H가 같이 사는 오빠네로 전화를 했다. 새언니가 전화를 받고선 잠시 기다리란다. 그러고선 함흥차사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든가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고 거짓말이라도 둘러댄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공중전화라 계속 기다릴 수도 없어 결국 약속은커녕 통화도 못하고 말았다. 학교에서는 H의 모습을 보기도 힘드니 그녀의 친구에게 강의에 들어가기 한 시간 전에 찻집에서 얼굴 좀 보자고 전했다. H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기다리는 나도 답답한 청춘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문리대 건물 현관에서 H를 기다렸다. 강의가 시작되어도 H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H였지만 얼굴이 조금 상했다.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었다.

“말… 전해…듣긴… 했어…요.“

그러고서는 나를 외면한 채 강의실로 들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완력으로 H를 불러 세우기에는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 네가 나를 마주 대하기가 힘들다면 또 기회가 있겠지 생각했다. 서둘러서, 억지로 H의 마음을 붙들기는 싫었다.

며칠 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H는 기력(?)을 많이 회복해 보였다.

“사람이 왜 그렇게 일방적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책을 든 손으로 마주 선 내 가슴을 때리듯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섬주섬 주워 서둘러 나를 피해 가버리는 것이었다.

여전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방어적이었지만 방학이 지나고 난 뒤에는 좀 더 필사적이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불한당도 아니고.

그다음에 H를 길에서 만났을 땐 숫제 먼저 만나자고 한다.

“형을 한번 만나긴 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만나자는 말을 꺼낸 것이 영 개운하지 않지만, 내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니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이 너무 철학적이라, 제가 부족해서인지 형을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와서는 하는 말이, 그토록 힘이 들었나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남자로서 여자를 힘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다면, 힘들게 해서는 안 되겠지. 앞으로 널 힘들게 할 일은 없을 테니 편한 마음으로 지내라”라고 말할밖에.


솔직히 의도적으로 H를 압박한 면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러나 그 또한 H의 태도가 가져온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H의 마음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선택에 대한 믿음이었다. 나는 쉽게 어떤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일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경우의 수를 따지는 편이다. 그러나 이런 면이 단점이 될 때가 있다.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한다. 내 첫사랑이 그랬다. 그래서 어려웠을 것이다. 이성에 대한 경험이 없는데 H의 마음을 잘 살펴 대응할 수 있을까. H에 대한 내 마음이 진정인만큼 더욱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여자의 마음이었다. 이럴 경우 처음에 가진 내 마음을 붙들고 갈 일이었다. 내가 선택한 인연이기에 H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한순간도 거둔 적이 없었다. 그 마음 안에서 H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내가 확신을 못하는데 H에게 확신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H를 압박한 것은 그 확신을 잡기 위해서였다. 지나고 보면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H도 마찬가지로 성숙된 사랑을 하기에는 많이 어렸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조바심을 내면서 자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은 무심한 듯 보여도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자라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씨앗을 지키고 가꿀 일이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일이 아닌 것이다. 유치환 시인의 시와 같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한 일이 아닌가. 이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 내가 가진 생각도 이에 조금은 엇비슷했지만, 어쩔 수 없는 청춘이라 감정의 유희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H도 마찬가지로, 아마도 나보다 더 감정적이었으니 나를 이해할 수 없어 철학적이라는, 독해가 어려운 말을 했을 것이다. “형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아요”라는 H의 말처럼 처음 두 사람이 모두 서로에 대하여 가졌던 마음 만을 믿고 서로를 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더러 일방적이라는 H의 말을 훗날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H에게 나에게로 나아오라고 강요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내 자세였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내가 H에게 백기 투항을 강요한 셈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가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첫사랑을 결코 잊지 못하는 까닭은 어설픈 사랑으로 해서 얻은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의 잘못으로 마음에 생긴 생채기가 쉽사리 아물지 못나고 덧나기 때문인 것이다. H가 나에게 다가올 틈조차 주지 못했기에 나는 H의 어떤 행동도 모두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참 이기적인 생각인 줄은 알지만, 그때 나를 꼭 그렇게 대했어야 했나,라는 아픈 생각을 여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라는 사람이 본래 이기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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