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풍경(4)
1980년대 만해도 세종로 사거리에서 이어지는, 종로 1가에서 종로 3가까지는 명동과 함께 서울에서 최고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명동이 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옷차림에 있어 우리나라의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다면 종로는 서민적인 분위기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맛집들이 즐비,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의 발길을 이끌던 곳이었다. 명동이 뻔질나게 드나들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었지만 음악을 듣기 위해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을 찾을 때 간혹 갔었다. 이때 명동은 유행을 선도하는 곳으로 이에 어울리게 명동에서 보는 여자들의 물이 달랐다. 명동과는 달리 광화문 가까이의 종로가 소박했던 것은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과 같은 재수 학원이 밀집, 주머니가 가벼운 재수생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고시 학원이 밀집한 노량진에서 컵밥이 탄생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을지로와 시청 지역이 직장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주점이 많았다고 한다면, 종로에는 재수생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같은 젊은 층이 많이 찾던 곳이었다. 당시 전국 최대의 서점이었던 종로서적이 종각 바로 옆에 있었고, 종로 3가에는 피카디리, 단성사와 같은 극장이 있어 젊은이들이 외면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종로였다. 종로 2가의 종로서적과 건너편 YMCA는 실시간 연락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에 만남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종로를 종로답게 한 것이 저렴한 음식점과 주점이 즐비했던 피맛골이었다. 피맛골이란 본래 조선시대에 말을 타고 가는 고관대작의 행렬을 피하기 위해 조성된 좁은 골목길로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피맛골에서 내가 주로 갔던 곳은 종로 1가에 밀집해 있었던 생선구이집들과 YMCA 옆으로 난 인사동과 연결되는 좁은 골목길에 있는,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주점이었다.
초라하지만 정겨운 피맛골이 도심 재개발로 사라질 지경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발굴, 피맛골을 다시 조성하기로 했단다. 그러나 재조성 된 피맛골을 피맛골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 같다. 현대식으로 조성된 길과 건물에서 옛 골목길이 주는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새 건물에 들어선 음식점들도 번듯한 도심의 그렇고 그런 음식점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몰개성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종로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골목길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옛 건물을 헐고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이 바람에 불고기 백반으로 유명한 청진식당이 청계천 쪽으로 이전했다. 진짜 피맛골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씁쓸하고 아쉽다.
지금의 종로를 볼 때마다 이십 대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낭만의 흔적이 현실에서는 점점 찾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생이 가지기 어려웠던 오디오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해 주었던 음악다방 글로리아와 레스토랑 아그레망. 이곳에서 탄노이와 알텍 스피커로 듣던 클래식 음악의 감미로움이 지금도 귓가에서 맴돈다. 억눌린 청춘의 열정을 발산하던 디스코텍 마부, 이곳은 닭장이라는 속어에 어울리게 비좁아 춤을 추다 보면 옆사람의 발을 밟기가 부지기수였지만 그것도 나름의 재미였다. 그리고 저렴하게 신선한 생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자이언트 비어와 그랜드 비어. 주된 약속장소로 지식을 공급해 주던 종로서적. 2016년 말에 종로타워 빌딩 지하에 옛 종로서적의 직원들이 힘을 합해 같은 이름으로 대형서점을 열었지만, 옛 종로서적이 가졌던 무형의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종로가 예전의 영화를 잃어간 이유라면 강남이 개발되면서 주요 상권이 분화한 것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층의 취향이 변한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취향의 변화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건물들은 보다 밝아졌고 높아졌고 청결해졌다. 그 사실만으로는 도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변화에 의해 도시는 개성 없이 획일적이 되었고, 낡은 건물과 누추한 골목에 서려있는 삶의 친근한 풍경이 사라졌다. 옛 종로 거리에서 느끼던 친근함이 사라진 종로가 날이 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이제 곧 연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가들 지인들과 송년모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은 데다가 코비드라는 감염병을 경험한 이후로 송년모임의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내가 경험한 1980년대에는 지난 한 해가 오죽 힘들었으면, 그리고 얼마나 잊고 싶은 일이 많았으면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되도록 술을 마셨을까. 정치적 현실에 따른 억눌린 사회 분위기와도 맞물린 현상이었을 것이다. 버스와 지하철도 끊긴 늦은 시간에 술에 취한 채 차도에까지 진출, 택시를 잡으며 귀가를 서두르던 종로의 풍경이 그립다. 그 어수선한 공간의 중심에 그 시절을 살아간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YMCA 옆골목에서 미나리새우전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옛 종로를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