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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고 잣이고 간에, 꼭 그랬어야 했니?

-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더라 2(4)

by 밤과 꿈

내 첫사랑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운 것은 애틋한 감정을 나누거나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H와는 제대로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썸이나 밀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아픔만 남게 된 사이였다. 비로소 하는 말이지만 H와 그런 사이로 끝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첫사랑이니만큼 서툴게 여자를 대한 면이 컸다. 그렇더라도 고집스럽게 유지했던 내 태도가 H에게는 벽이었으리라 생각한다.

H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인 이후, H와 후배 사이가 별 볼 일 없이 정리된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H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언제부터인가 네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라고. 내 말에 H의 표정은 분명 행복한 것이었는데, 하는 말이라고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란다. 여자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이해하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잘 이해가 안 간다.

남자와 여자의 사고가 다르니만큼 여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말 자체가 타당하지가 않을 것이다.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고 수십 년을 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성별에 따른 사고의 차이다. 이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억지로 서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그러면 시간의 축적에 따라 이해가 쌓이지 않겠는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마찬가지로, H의 말이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따지고 들 일도 아닌 것이 그 모습 자체가 H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서 마치 H를 모두 이해한 것처럼 빈말을 남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했다. 사고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할 기초는 오직 대화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넋두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자들은 왜 남자의 오버액션에 감동을 받는지, 왜 사랑을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않는지, 답답한 일이다. 평범한 여자인 H에게 보다 이성적이기를 바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 사실, 내가 그런 의도를 가졌다기보다는 내 성격대로 나는 행동했을 뿐이고, 성격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 청춘사업은 접점을 못 찾고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가 아쉬웠다.

대화를 거듭 말하고 있지만 내가 사교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라서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썩 많은 편은 아니다. 말 주변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주제를 가진 대화가 아니라면 큰 흥미가 없어서다.

훗날 고향 후배의 소개를 한 여학생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사전에 그 여학생이 미술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미학 관련 서적 한 권을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었다. 그 책이 죠지 딕키의 ‘미학 입문’이었는지 허버트 마르쿠제의 ‘리얼리즘 미학의 기초 이론’이었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다. 그 책을 들고 간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호구조사 식의 대화, 즉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신가요?” 라든지 “가족이 어떻게 되시나요?”와 같은 공허한 대화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고 간 책을 본 그 여학생이 했던 “미학,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었다. 장소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커피 마시고, 저녁 먹고, 술 마시고 8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결국 진주에서 마산 가는 차편이 끊겨 한 장소에서 돈을 다 쓴 나를 그 여학생이 총알택시를 태워줬었다. 그 여학생과는 인연이 아니었기에 오래 만나지는 않았다.

결혼 전 아내와 한 데이트도 대부분 주점에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사악하게도 목사의 딸을 술집으로 인도한 셈. 아내가 제안을 해서 춘천이나 영종도 등으로 데이트 장소를 넓히게 되었지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술과 대화가 전부였다. 과묵해 보여도 알고 보면 나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 그 대화가 서로에게 작은 의미라도 있을 때라는 단서가 있지만.


누차 말하지만 내가 H와 주도권 다툼(연애에 있어 그런 것이 있다면)을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나는 내가 생긴 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여자가 좋아할 만한 말이나 행동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할 까닭도 없었다. 내가 뛰어난 배우도 아니고 거짓으로 연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H에게는 그토록 힘든 것이었나 보다. 내가 H를 이해하지 못한 점은 별로 없었다고 본다. 이것도 내 착각일 수 있겠지만, 내가 H에 대해 느끼는 그대로 그녀를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H가 보고 싶으면 보고자 했고, 그녀가 나로 해서 마음이 상했으리라 생각되면 하다 못해 나도 그만큼 마음을 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도 H에게는 벽이었던 것 같다.

H의 과 친구와 사귀던 내 동기생이 있었다. 동아리 M.T. 에서 그 동기생이 나에게 하는 말이 “야, 넌 웬 개똥철학이야“란다.

“……?”

무슨 시답잖은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관련한 고민을 H가 친구에게 토로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H에게서 두 번이나 들었던 것이다.

“형은 너무 철학적이라… 제가 부족해서인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형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H가 내 말에 마음이 상해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간 이후 같이 커피 한 잔을 마신 적이 없는데 무슨 철학?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나를 피하는 H 때문에 나도 상심이 컸지만, 내가 아픈 만큼 H도 마음이 아프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친구들과 함께 H를 만났을 때도 여전히 그 소리였다.

“그때 형은 너무 철학적이라, 참 어려웠어요”라고.

나이 사십 줄에 들어서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답답하면서도 조금은 섭섭했다.

철학이고 잣이고 간에 이십 대에 H가 나로 인해 (아마도 질식할 만큼) 힘들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래도 그토록 방어적으로 나를 대했어야만 했는지 안타까웠다. 물론 여자의 자존심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만큼 했으면 나라는 남자가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있더라도 못 이기는 척 얼굴을 맞대고 얽힌 실타래를 풀 듯 사이를 개선해야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무슨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끝난 사이고 아닌데 말이다. 끝나기는커녕 뜻하지 않은 갈등으로 시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터에. 자기중심적인 생각이겠지만 꼭 그렇게 나를 대했어야 했는지 지금 H를 만나게 된다면 원망처럼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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