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3)
이번 겨울은 예년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린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몇 년 동안 현저히 눈을 구경하기 쉽지 않은 겨울을 맞이했었기에 드는 생각일 것이다. 눈 구경할 일이 전혀 없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던 1980년대 초반 서울에는 눈이 엄청 왔었다. 이렇게 말하면 강원도 산간에서 사는 사람이 듣기에는 헛웃음이 나올 만하겠지만, 지금과 비교할 때 그 시절에 눈이 많이 내렸던 것은 사실이다. 좀 더 적확하게는 지금이 그때보다는 눈이 적게 내린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릴 때 겨울의 눈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사랑의 학교’가 있었다. 초등학생인 엔리코의 일기 형식으로 기술된 이 소설에는 유독 눈에 대한 짧은 글들이 인상적이었다. 워낙 눈을 보기 힘든 곳에서 살았던 까닭일 것이다.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의 내용도 나이가 들어 읽으면 감동이 반감된다. 자신이 순수의 시절을 이미 지나쳐 왔다는 사실도 있겠지만, 소설의 내용에서 문학 외적인 목적이 읽히기 시작한다는 사실도 감동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된다. 아미치스가 살았던 19세기 이탈리아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중세시대와 같이 지방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 그래서 어린 세대에게 삶의 용기와 함께 민족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을 교육할 필요를 아미치스가 느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낯설지 않은 학교 생활의 모습과 정서로 해서 ‘쿠오레’(마음이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접했던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효시라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단편소설에 ‘눈보라’가 있다. 푸시킨이라면 러시아의 민족 정서를 잘 묘사한 시편들과 함께 ‘예브게니 오네긴’과 ‘대위의 딸’과 같은 소설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금처럼 눈을 말할 때 떠오르는 푸시킨의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눈보라’가 있다. ‘벨킨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푸시킨의 첫 단편집에 포함된 짧은 소설로 현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소설의 구성이 평이한 면이 발견되지만, 의외의 반전과 같은 단편소설이 지닌 미덕을 놓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작은 마을 네나라도보에서도 손꼽히는 신붓감으로 소문난 마리아는 휴가 중에 마을을 찾아온 청년 장교 블라디미르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마리아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이에 두 사람은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한 후 훗날 허락을 받기로 하고 멀리 떨어진 마을 자드리노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그날, 블라디미르는 눈보라에 갇혀 길을 잃은 채 자신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다. 한편, 노심초사 블라디미르의 도착을 기다리던 마리아는 눈보라 속을 헤매다 사람들에게 구조되어 교회로 몸을 피한 한 군인을 신랑 블라디미르로 착각, 결혼을 할 뻔한다.
몇 년후인 1812년 나폴레옹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침공으로 블라디미르는 전사하고, 부상병을 간호하던 마리아는 부상을 당한 기병 대위 부르민을 간호하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부르민 대위는 블라디미르로 착각해 결혼을 할 뻔했던 바로 그 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줄거리만으로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설정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 러시아 민중의 삶과 해학이 푸시킨의 문장에 녹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외국어라는 한계로 그 묘미를 온전히 체득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이효석이나 김유정의 소설이 가진 정서를 어떻게 제대로 외국어로 옮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구 소련의 작곡가 게오르기 스비리도프가 푸시킨의 소설 ‘눈보라’를 ‘푸시킨의 소설에 기초한 음악적 삽화‘라는 제목으로 음악화했다. 스비리도프의 음악 ’눈보라‘는 아홉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으로 그 네 번째 곡이 우리에게 ’올드 로망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로망스이다. 이 곡을 ‘올드 로망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작곡자 자신이 사용한 용어는 아니다.
모음곡 ‘눈보라’는 1964년 블라디미르 바소프 감독이 푸시킨의 소설 ‘눈보라’를 영화로 제작하면서 스비리도프에게 음악을 의뢰, 작곡되었다. 우리에게는 김연아의 안무곡으로 친숙해진 ‘올드 로망스’는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과 첼로, 오보에와 플루트 독주로 이어지는 애절한 주제의 연주에 이어 현악 총주의 하강 선율이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보라를 묘사하는 듯도 하고, 다다르지 못하는 사랑의 간절한 마음을 묘사하는 듯도 하다. 이어지는 금관악기의 포효가 두 남녀의 어긋난 사랑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의 순간이 지나간 뒤 음악은 클라리넷의 조용한 연주로 끝이 나는데 이 또한 아픈 여운을 남긴다.
소설도 음악도 여기서 끝이 났어도 좋았겠다 싶다. 이어지는 또 다른 만남과 사랑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매사에 긍정적인 러시아 사람들의 심성에 기댄 결과이리라. 그래도 여전히 ‘올드 로망스’의 애절하고 격정적인 선율이 귓가에 맴돌면 눈보라에 갇혀 어긋난 사랑에 덩달아 마음이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