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2)
유독 금년 연말이 쓸쓸하다. 코로나로 바깥출입이 어려웠던 지난 몇 년간보다 쓸쓸함이 더한 느낌이 든다. 우리의 일상을 통제하던 물리적인 제약이 모두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우리 마음에 어떤 기대 심리도 남아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코로나라는 감염병이 창궐할 때에는 어려운 시간도 지나 가리라는 희망이 있어 능히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측이 가능한 긍정적 지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우선 정치가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여건도 우호적이지가 못하다. 이럴 때 희망을 가지는 것은 차라리 고문일 수 있다.
최근에는 더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 때문에 장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가파른 인구 감소율을 근거로 한 소식이다. 이런 부정적인 소식이 우리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신에서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그것도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거의 동시에 여러 번 언급되었으니 섣부른 판단이라고 애써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에 젊은 사람들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질 여건이 못 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가, 우리 사회가 그럴 여건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는커녕 결혼조차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길게 말할 필요도 없고, 젊은이들을 탓할 문제도 아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이끌고 온 기성세대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 1970년대의 경제개발 계획으로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의 어두운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거두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에게 이식된 ‘천민자본주의’라는 변이종은 철벽 같은 빈부의 격차를 낳고 물질 만능의 사회 풍조를 고착화했다. 흔히 쓰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웃픈 말이 결코 웃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아냥에 다름이 없다. 보다 많은 물질을 가지는 것 이외에는 삶의 가치와 보람을 찾을 길이 보이지 않으니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를 어려서부터 공부 지옥으로 등을 떠밀어 넣고 있다. 그런데도 획기적인 제도의 개선이나 의식의 전환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자유 경쟁의 기회마저 박탈된 것이기에 윤 대통령이 곧 잘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을 차분한 마음으로 보내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은 연말 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일 게다. 그래도 나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좋다. 그만큼 지나온 일 년이라는 시간이 기쁘고 보람된 것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연말에는 성탄절이 있어 한껏 들뜬 분위기를 북돋운다. 물론 기독교인에게는 성탄의 직전, 즉 대강절이 차분하게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이지만, 지나치지만 않다면 조금은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도 괜찮지 않을까.
연말 분위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대형 음반매장의 등장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곳곳에 있었던 작은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가게 밖으로 내어놓은 허름한 스피커가 분주한 거리에 캐럴을 선물했었다. 음반 가게도 사라졌지만 저작권 문제로 더욱 집 바깥에서는 캐럴 듣기가 어려워진 현실이다. 그나마 유튜브가 있어 다양한 음악과 영상을 접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일일이 찾아 듣고 볼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어릴 때 집에는 팻 분의 크리스마스 엘피 음반이 있었다. 비록 빽판이라고 부르던, 조잡한 음질의 해적판이었지만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불교 집안에서 TV와 함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접할 수 있는 도구였다.
그렇게 살았던 내가 목사의 딸인 아내와 결혼을 해 기독교인 되었으니 내 청년기를 알고 있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면서 담배도 하루에 한 갑 반(술을 마시면 세 갑, 안주는 입에 대지 않고 담배가 안주였기에)을 피워대던 골초가 교회라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개과천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드디어 미쳤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했다. 그만큼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은 한동안 화젯거리였다.
신혼 때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트리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집안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소년중앙과 같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크리스마스의 화려하고 정겨운 느낌을 늘 부러워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성가대로 이십여 년을 봉사하다 보니 해마다 한 달은 일찍 성탄의 느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성탄예배 칸타타 연습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연습에 지치다 보면 내가 그리워했던 성탄의 분위기를 채 느끼지 못하고 이 절기를 넘어가게 된다. 아내야 성극 준비와 새벽송에 대한 추억이 있겠지만 나는 성탄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었기에 자칫 공허하게 이 축복받은 절기를 보내게 된다. 더욱이 우리 사회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서 느끼는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더 쓸쓸한 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캐럴이 주는 따뜻한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해마다 어김없이 성탄절은 우리를 찾아온다. 성탄이 이천여 년 전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더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여전히 어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전쟁으로 갈등은 상존하고 절망이 삶의 한쪽을 붙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약속의 완성으로 다시 오는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올해도 내년도 성탄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희망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기에 세상이 절망 중에 있더라도 캐럴이 울려 퍼지는 절기였으면 좋겠다. 캐럴에는 기쁨과 희망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기뻐하라, 소리 높여 외쳐라, 오늘을 찬양하라”라는 합창곡으로 시작한다. 성탄을 주제로 한 음악 중에서 이 곡처럼 성탄의 기쁨을 환희의 선율로 표현한 음악을 달리 찾지 못한다. 이 곡처럼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