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崔北)과 뒤파르크(Duparc)

-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5)

by 밤과 꿈

우리의 미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이 있다. 지금에는 그림으로 보다는 기벽으로 더 기억되는 화가이지만 생존 시에는 겸재 정선이나 현재 심사정, 그리고 단원 김홍도에 비견될 만큼 재능을 인정받았던 화가였다. 그렇지만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최북은 이재와는 거리가 있어 평생 가난했고, 그만큼 술에 얽힌 일화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일화라면, 최북이 명망 있는 양반가의 집에 입주하여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지만, 도대체가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는 듯 매일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최북의 이런 모습에 분노한 양반이 당장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최북의 눈알을 뽑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모양.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북은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찌르고선 화구를 챙겨 양반의 집을 떠나갔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다소 거친 내용이지만 최북의 성격을 짐작케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화는 한편으로 최북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북이 가진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여실히 보여준 예라고 하겠다. 신분의 경계가 뚜렷했던 조선시대에 살면서 중인의 신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성향을 지닌 예술가로 최북에 대한 평가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쉽게 화합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결코 긍정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최북의 이런 면면이 더욱 흥미롭게 생각되는 것은 19세기 서양에서 형성된 낭만주의 예술가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기질에 대입시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최북은 19세기의 유럽이 아닌, 18세기 동양의 조선이라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살았던 환쟁이에 불과했다. 그의 기벽을 천재의 징후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성격 파탄자로 인식되기 일쑤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최북이었다.


작자 미상의 최북 초상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80년대 KBS 라디오에서 방송되었던 ‘내 마음의 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시인이 있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살면서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었기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견이라고 부를 만한 시력을 쌓아온 시인이었다. 자신의 뜻이 있었다면 중앙 문단에서 꽤 이름을 알렸을지도 모른다. 그럴 능력은 있었기에 방송국에서 그를 불러 시인 지망생의 시를 평가하게 하고, 자신의 시업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양반은 중견의 시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권의 개인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옛 선비의 예에서 찾고 있었다. 우리 옛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글을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호를 딴 포은집이니 목은집이라는 것은 후손들이 선대인 저자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하게 여겨지지만 문화가 곧 산업이 된 현대사회에 소수의 식자층, 곧 선비라고 부를 만한 양반층이 문화를 향유하던 시대의 잣대를 들이댈 문제는 아닐 것이다. 1차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를 매개하는 두 축, 즉 2차 생산자인 출판사와 유통을 담당하는 서점의 존재 가치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름 모를 그 시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시인의 생각이나 행동이 시대와 맞지 않으면 그 또한 기벽이다. 그 점에서는 최북과 비슷하다.


앙리 뒤파르크라는 작곡가가 있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로 프랑스 예술가곡(멜로디) 분야에서는 가브리엘 포레와 함께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가 단지 십여 곡의 노래 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놀랍다. 뒤파르크는 일생동안 작곡한 각종 장르의 음악들을 모두 파기, 십여 곡의 가곡 만을 후세에 남긴다. 흔히 연주되는 15~16곡의 가곡 외에 관현악곡이 한 곡 남겨졌지만 의미 있는 족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로지 가곡 작곡가로서 음악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뒤파르크는 세자르 프랑크의 제자였지만 그의 가곡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이 뚜렷하다. 바그너의 화성을 적극 도입했다는 점에서 뒤파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후고 볼프와 비교되기도 한다. 바그너의 추종자였던 볼프가 오직 리트(독일의 예술가곡)의 작곡에 몰두, 가곡의 오랜 이상이었던 언어와 선율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낸 독일 리트의 완성자였듯이 뒤파르크는 같은 이유로 프랑스의 가곡을 독일 가곡의 수준으로 그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음악 외적으로도 뒤파르크는 볼프와 닮아 있다. 볼프가 성병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일생의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면서 250여 곡에 달하는 가곡 중 대표적인 곡들을 투병의 와중에서 작곡했다면, 뒤파르크 또한 극심한 신경증으로 인생의 후반 30여 년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볼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볼프가 정신병을 앓으면서도 오히려 왕성한 창작을 이어간 반면, 뒤파르크는 은둔 생활 중에 작곡에 손을 놓았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을 정리, 십여 곡의 가곡 만을 남기고 나머지 작품을 파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불과 십여 곡의 가곡 만으로도 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뒤파르크, 자신의 예술에 엄격했던 한 음악가의 전형을 그에게서 본다. 이렇게 뒤파르크를 생각하면서 화가 최북을 떠올리는 것은 닮은 듯 다른 두 예술가의 삶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뒤파르크가 타인이나 시대와의 관계에서 불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엄격했다면, 최북은 타인까지도 용납하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다. 자신의 시대와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예술의 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두 예술가를 통해 해 본다.


보들레르의 시에 의한 뒤파르크의 가곡 ‘여행에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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