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6)
대학 진학을 위해 1981년 서울에 정착한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보내게 되었다. ‘보냈다’가 아니라 ‘보내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반드시 서울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이 도시를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여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이 말은 도시 생태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면면을 표명하고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장점이라면 문화, 의료 등 각종 인프라의 혜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이기에 소비 산업이 발달, 다양한 먹거리와 유흥 산업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얼핏 보기에 도시 생활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화려함에 가려진 어두움 또한 도시의 또 다른 일면이다. 도시에는 화려함과 어두움이라는 상반된 모습이 만든 골짜기가 존재한다. 도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도시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골이 깊다.
도시 빈민과 노숙자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이 수반되는 산업사회의 최전선인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골짜기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결코 이 도시에 온전히 안착하지 못하는 것은 이 골짜기에서 우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이 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혜택과 경제적 기반에 발목이 잡혀 진정한 자아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로 너나없이 모여드는 것은 경제 활동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사실을 잘 묘사한 것으로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가 있다. 대공황의 시기에 오클라호마주에 불어닥친 한파와 대규모 농장 기업과 결탁한 은행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영세 농민들은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찾아 몰려든다. 그러나 과도한 노동력의 유입으로 임금은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인력이 속출하지만, 이미 삶의 터전을 잃은 고향으로 갈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 빈민이라는 나락으로 내몰리게 된다.
물론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도시 생활이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도시 노동자의 임금은 제도화되어 교묘하게 통제되고 있다. 또한 노동력과 함께 잉여가치 증식의 주요 수단인 지대, 즉 부동산에 대한 투자로 도시에서의 빈부 격차는 갈수록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재화가 집중된 소수의 사람 이외에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대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게츠비의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지 못한 꿈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는 대도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상반된 도시의 두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부유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도시인의 초상을 잘 표현한 미술 작품 두 점이 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조각가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라는 작품이다.
출근길, 혹은 퇴근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하루의 기대나 보람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군상의 모습에서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저들이 걷고 있는 곳이 지하철의 환승구이거나 출근길의 분주한 거리이거나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는 퇴근길의 어느 지점인지 간에 저들의 모습에서 도시가 만든 골짜기를 걸어가는 불안이 감지된다. 무리 속에 있지만 저들 각자가 자신의 불안을 떠안고 있는 고독한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또 하나의 작품으로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인 ‘나이트호크’가 있다. 심야에도 불을 밝힌 식당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요리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와는 무관하게 혼술(?)을 하고 있는 남자, 두 남녀나 요리사와는 거리감이 있다. 이 고독한 남자가 이 그림의 중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식당의 구도도 혼자 있는 남자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소실점은 모퉁이를 돌아 어둠에 잠긴 골목길로 연결, 시선을 이끌고 있다. 반면 식당의 불빛이 연장되어 밝게 그려진 화면은 이를 등진 남자에 의해 단절되고 시점이 어둠을 향하는 형국으로 화면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밝음과 어둠의 접점, 도시의 두 얼굴이 마주하는 골짜기에 우리가 있다.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닮은 음악이 있다. 재즈 색소포니스트 게리 멀리건이 피아노를 연주한 ‘나이트 라이트’. 그 곡이 실린 앨범의 재킷은 불을 밝힌 뉴욕의 맨해튼 전경 이미지로 디자인되어 있다. 음악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재킷 디자인으로 그것 만으로도 음반을 소장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따뜻하다기보다는 차갑게 느껴지는 도시의 불빛, 야경은 꿈인 듯이 아련하다. 그래서 우리는 밝음과 화려함 속에서도 오히려 고독하다. 그리고 음악은 고독을 노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라고 한다. 요즘은 워낙 경기가 좋지 않아 술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술자리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요한 하위징아의 저서 ‘중세의 가을’에서는 중세시대의 특징으로 먼저 ‘양극단의 선명한 대비’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 건강과 질병, 선과 악, 부와 가난과 같은 이미지가 실생활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하위징아는 ”이런 지속적인 대비로부터, 그리고 모든 현상이 중세인의 마음에 새겨놓는 다채로운 형식들로부터, 중세인들의 일상생활은 치열한 충동과 열정적인 암시를 받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 중세시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만큼 이해하기 힘든 면이 많았다.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기사는 자신의 주군인 영주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시로 쓰고 노래 불렀다.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이 이렇게 탄생했다. 아마도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었기에 상상 속에서나마 꿈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렇게 중세시대는 환상이 실제처럼 인식되었던 시대였다. 요즘 유행하는 해리 포터와 같은 판타지 문학의 기저에는 중세시대의 전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현실이 열악하고 고통스러울수록 환상은 강렬했다.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종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에서 전승되고 있는 여러 축제 또한 현실과 대비되는 환상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오늘,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라고 다를까? 양극단의 대비가 뚜렷한 도시에서 ‘게츠비의 꿈’을 꾸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도시의 두 얼굴 사이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고독을 이기기 위해 술에 취한들 큰 잘못일까? 그것 또한 삶의 일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취하지도, 쉽게 즐거워지지도 못하는 것이 도시에서의 삶이다. 그것이 환상인 줄을 알기 때문에. 끝으로 듣는 음악도 살짝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