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哀歌), 자기 정화를 노래하다

-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10)

by 밤과 꿈

음악을 듣다 보면 비가, 혹은 애가라는 제목을 가진 곡을 많이 접하게 된다. 비가(elegy)나 애가(lament) 모두 슬픈 노래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뜻을 가지고 있다. 대중음악이라면 보다 구체적인 제목을 제시하겠지만 이처럼 추상적인 제목은 클래식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얼핏 떠오르는 곡으로는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2곡의 비극적 트리오, 또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비가가 있다. 또한 글린카의 피아노 트리오 ‘비극적’이 있고, 비가라는 부제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딸의 죽음 이후의 슬픈 감정을 담고 있는 스메타나의 피아노 트리오 g단조에도 ‘비가’라는 부제를 부치고 싶은 음악이다. 그리고 포레의 ‘비가’를 빼놓을 수 없다.

애가라면 구약성경의 ‘예래미아 애가’가 생각난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선율과 리듬을 살린 노래의 형태를 갖추었을 것이다. 사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구전의 형태로 전승될 때 쉬운 노래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승의 고대 노래인 ’공무도하가‘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종의 애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현재 음악의 형태로 접할 수 있는 곡 중에서 가장 절절한 슬픔을 표현한 곡이라면 폴란드의 현대 작곡가 헨릭 고레츠키(구레츠키라고도 기재한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애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교향곡은 성악을 포함한 ‘성악 교향곡’으로 3개의 느린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음악이라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15세기 중세 수도원의 라멘트 성가의 선율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옥타브를 넘지 않는 중세 성가는 극격한 음의 변화가 없이 평안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만큼 고레츠키의 이 곡 또한 3개의 악장 모두 느리게 진행한다. 각 악장마다 소프라노 솔로가 부르는 폴란드어 가사의 노래가 더해진 형식으로 이 곡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만행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이 2악장 가사의 텍스트 때문이다. 2악장의 가사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18세 유대인 소녀가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에 감방 벽에다 쓴 “어머니, 울지 마세요. 하늘의 천사들이 항상 저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아멘“이라는 글을 가사로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1악장 가사의 텍스트는 중세 애가의 하나인 ‘성모 마리아의 탄식’을, 3악장 가사의 텍스트는 실레지아 봉기 당시 실종된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슬픔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곡을 반드시 홀로코스트와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곡자 자신도 이 곡에 대하여 어머니와 자식 간의 보편적인 유대, 즉 사랑과 그 단절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과 이에 따른 무고한 살상을 감안할 때 충분히 공감이 가는 곡이다. 그러나 현 세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슬픔은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국면이다. 뿐만 아니라 슬픔이라는 국면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정화시키기도 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바닥상태를 경험하면서 그 바닥을 극복할 힘을 얻기도 한다. 카타르시스, 우리가 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면서 우리는 좀 더 인간적이 될 수도 있다.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 우리에게 슬픈 감정에 공감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은 숭고(崇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슬픔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위로가 따른다. 예수도 말하지 않았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우리가 이런 음악을 듣는 이유도 그렇다. 곡이 주는 슬픔에 공감하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화, 그것이 음악의 힘이다.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비가’ 중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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