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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Sep 03. 2024

프롤로그-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영아기와 유아기의 일부를 보낸, 남쪽 지방 작은 도시아름답고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내가 몇 살까지 그 집에서 살았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다.

적어도 초등학교 취학 전이라는 사실만큼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취학 전이라도 이후에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는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바깥세상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떠올리자면 유난히 키가 커서 키다리 아줌마라고 불리던 동네 아줌마의 집 담벼락에 소담스럽게 피어난 나팔꽃이라던가 이찌지꾸(이 식물이 바로 무화과라는 사실은 커서 알았다) 열매가 탐스러웠던 윗마을의 어느 집이라던가 해 질 녘, 옆집에서 살았던 소꿉친구와 함께 바삐 집으로 돌아오는 모퉁이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눈길을 마주쳤던 굴뚝새와 같은 기억들.

단편적이지만 정겨운 기억들이다.

 물론 이처럼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쥐틀에 사로잡힌 쥐를 쥐틀 째 시궁창에 빠뜨려 죽였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쥐 잡는 날을 따로 정할 만큼 쥐가 극성을 부렸다.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라는 쥐 잡기 운동의 포스터 문안이 말하듯 온 나라가 온통 쥐 잡는 일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열악한 보건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부의 시책이었지만, 덕분에 쥐의 천적인 여우까지 씨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추억의 반공 포스터에서 간첩을 쥐로 묘사할 정도로 쥐는 철저하게 박멸해야 할 혐오의 대상이었다.

한편, 잡은 쥐를 질식사시켰던 그 장소에 죽은 병아리를 묻어주었던 영화(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같은 기억도 있다.

홍수가 나면 범람하던, 그러나 평소에는 물이 메말라 생명이 썩어가는 개울 옆으로는 도덕회라는 이름의 종교시설이 있어 머리를 쪽진 할머니(어린 나이라 할머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중년의 여성이었을 것이다)가 근엄한 표정으로 땡땡 종을 치는 모습도 기억난다.


 그러나 예의 아름다운 한옥에서 내가 바깥세상과 접촉했던 기억은 전혀 않는다.

오직 한옥이라는 공간과 관련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그때, 그러니까 한옥에 대한 기억이나마 남아있을 때 내 나이가 바깥에 내놓지 못할 만큼 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나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몇몇 가지 이미지는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그러니까 아름다운 한옥에서 보냈던 유년기를 내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볼 때 가장 강렬하고도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 조금은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왜, 하필이면 집이라는 보금자리를 벗어난 적이 별로 없었을, 벗어났다고 해도 철저하게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었을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시절이야말로 성장기를 통틀어서 어떤 외적 요소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가장 순수한 상태의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타고난 순수를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아닌 것, 즉 낯선 환경과 타인과의 접촉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개인에게 모종의 타협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개인이 어린아이라면, 어린아이에게 요구되는 타협이란 바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타고난 순수를 지속적으로 잠식당하는 것을 뜻한.

그리고 우리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타협이라는 인생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지혜롭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철이 든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깨우치는 과정이며 이는 타고난 순수를 잃어가는 과정과 다름없다.

 좋았던 기억으로 남은 그 시절, 내가 한옥이라는 유년의 뜨락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아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어린아이의 마음을 순백의 상태로 유지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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