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는 선구적인 힙합 가수 퍼블릭 에너미가 부르는 비트감 넘치는 노래 'Fight The Power'와 함께 시작된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인종 간 갈등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급진적이고도 정치적인 이슈를 지닌 저항의 노래 운동으로 등장했던 1989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퍼블릭 에너미의 이 비트감 있는 노래와 같이 역동적인 이 영화는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브루클린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무겁지 않게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인종 간, 계층 간 갈등이라는 어두운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주게 된다.
브루클린의 한 흑인 주거 지역, 그 마을 사람들을 주된 청취자로 하는 일인 방송국 '위 러브 라디오'의 DJ 러브 대디(새무얼 잭슨扮)가 말하는 것처럼 섭씨 40도의 무더위가 사람들의 일상을 짓누른 그날, 살(대니 레이로 扮)의 피자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무키(스파이크 리 扮)는 변함없이 마을 곳곳으로 피자를 배달하고 있다. 무키의 동선을 따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무키의 동네 친구들과 그를 살갑게 대하는 동네 어른들, 한인 가게 등 서로가 어울려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웃들이다. 길 건너편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와 함께 무키가 일하는 피자 가게의 이탈리아계 백인인 사장 살은 이 지역에서 터전을 잡은 이방인들이지만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흑인인 마을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다. 특히 살은 25년을 이곳에서 자리 잡고 흑인들에게 피자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무더위에 짜증이 일상을 지배하고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는 짜증이 오래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관객으로 하여금 가지도록 한다.그리고 사람들이 나누는 짜증이 묻어나는 대화에서 그 예감은 인종 갈등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살의 피자 가게에서 불만에 가득 찬 무키의 친구 버깅 아웃(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扮)이 급기야 가게의 벽면을 장식한 명사들의 사진에 킹 목사나 말콤 엑스, 마이클 조던과 같은 흑인 명사의 사진이 없는 것에 대하여 살에게 시비를 건다. 흑인을 상대로 25년간 장사를 하면서 흑인을 무시한다는 불만인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노인 다 메이어(오지 데이비스 扮)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밀러 맥주를 구할 수 없자 내뱉는 "너희가 중국인이든지 한국인이든지 상관없어. 여긴 우리 나라야. 너희 나라로 돌아가 버려."라는 말속에서도 타 인종에 대한 흑인의 피해의식과 같은 반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흑인들의 피해의식은 할 일 없이 길거리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세 명의 흑인 남자들이 나누는 "저 한국인 부부는 미국에 온 지 일 년 만에 가게를 가졌어. 저들이 천재인지, 흑인들이 멍청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인에 의한 가게는 이곳에 없어."라는 자조적인 대화에서도 발견된다.
사건은 뜻하지 않는 이유로 발생한다. 늦은 시간에 지난번의 사진 문제를 따지기 위해 버깅 아웃이 살의 피자 가게를 찾아오고, 함께 온 라디오 라힘(빌 넌 扮)이 휴대용 카세트 오디오로 크게 털어놓은 시끄러운 퍼블릭 애너미의 노래에 짜증과 화가 잔뜩 난 살이 야구 방망이로 오디오를 부수게 된다. 이에 격분한 라디오 라힘이 이성을 잃고 살의 목을 누르게 되고, 라디오 라힘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폭력을 제지당하지만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평소에 살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마저 적개심을 드러내고 흥분한 마을의 흑인들의 폭동에 불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닌 피자 가게의 배달 사원 무키의 행동이었다. 쓰레기통으로 피자 가게의 창을 부순 무키의 행동을 신호로 가게 안으로 난입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가게는 파괴되고 급기야 불에 타버리게 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스스로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철저하게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통속적인 의미의 의인도,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소소한 일상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인 것이다. 그들이 각각 인종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인종 간의 갈등이 서로의 일상을 헤칠 만큼의 위기를 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디오 라힘의 목숨을 앚아간 경찰의 경우도 고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 '미국의 아들'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비거는 부유한 백인 돌턴 가족의 차량 기사로 취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돌턴 씨의 딸로 진보적인 대학생인 메리를 죽이게 된다. 결국 비거는 살인죄로 사형을 당하지만 실상 살인이라기보다는 과실치사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잔뜩 취한 메리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게 된다. 하필 이때 맹인인 돌턴 부인이 메리의 방으로 들어와 백인 처녀의 방에 있게 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 인기척을 없애기 위해 베개로 메리의 입을 누른다는 것이 질식사하게 만들게 된다. 심지어는 메리를 실종 상태로 만들기 위해 사체를 훼손, 벽난로 속으로 유기하여 불에 태운다. 이 엽기적인 행위도 처음부터 살해의 의도는 없었고 흑인이라는 입장이 만든 결과였다.
이 소설이나 영화 '똑바로 살아라'는 모두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흑인의 자의식과 피해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정체성을 말할 때 '불가시성'이란 용어를 흔히 사용한다. 미국의 흑인들은 원해서 미국에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자신의 땅에서 뿌리가 뽑혀 미국에 이식되어 노예로서 살았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세상에 흑인의 존재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부자도, 정치인도, 뛰어난 문학가나 예술가도 백인들의 자리였고 흑인의 존재는 지워진 것이었다. 이렇게 시원이 오래된 정체성의 불가시성으로해서 흑인의 피해의식이 내면에 깊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인종 갈등의 문제는 미국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하는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 사건이 있었던 다음날, 갈등의 온전한 봉합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마을에 러브 대디는 방송에서 "Wake Up, Wake Up!"이라고 소리친다. 어쩌면 이 소리는 인종의 차이를 떠나 인종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에 눈뜨기를 원하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목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