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집 앞에 쌓여가는 눈을 치우고, 염화칼륨을 구하러 주민센터를 다녀오는 등 모처럼 활기찬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지인과의 만남은커녕 저녁 산책조차 끊어졌으니 그동안 단조롭고 정적인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비로소 생각한다.
"일몰 이후의 시간이 그렇지, 부나방도 아니고......"라고 남의 힐난을 부를지도 모르지만 내가 워낙 야행성인지라 밤 11시 정도는 초저녁처럼 생각되어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그 시간에 잠들지는 않는다. 20대부터 체득한 습관이라 고칠 수도 없고, 사실 고칠 생각도 없다.
온몸에 눈을 맞으며 제설 작업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와 몸을 녹이며 생각하니 쌓여가는 눈을 그냥 두지 못하고 사람의 편의를 따라 괜히 걱정하고 허둥거린 것 같아 조금 전의 수고가 부질없다.
언제인가 강원도 정선에서 보았던, 발자국 하나 없이 눈에 뒤덮인 밭과 마찬가지로 눈에 파묻혀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을이 연출하는 미답의 설경에서 받았던 감동과 아름다움의 심경을 애써 깨트려야만 하는지......
땅 속에서 생명을 조금씩 키우며 따뜻한 봄날에 싹틀 작은 생명을 추위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바로 겨우내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있는 눈이다.
아직 눈이 채 녹지도 않아 봄기운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 눈을 이기고 꽃을 피우는 노란 복수초의 앙증맞은 자태에서 느끼는 감동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도시의 삶이다.
콘크리이트로 뒤덮인 도시에서는 작은 생명을 키울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설경이 주는 넉넉한 풍경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속으로 투덜거려 본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는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받게 되어있으니 문득 이곳에서의 삶이 약간 서글퍼진다.
밤이 늦도록 쌓여가는 눈을 오래 창으로 바라보다 잠을 설쳤다. 내리는 눈을 보고 마음이 들뜰 나이는 지났겠지만 어제는 어째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의 마음처럼 한껏 들뜬 기분이었다.
눈을 치운다고 허둥거렸던 조금 전의 행동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어린 날 눈 구경하기 정말 힘들었던 고향에서 어렵사리 만나는 눈송이에 대한 설레는 마음을 은연중에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젯밤의 불면에는 어린 날의 그리움이 묻어있었을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운 상실감이 나를 불면으로 이끌었지도 모를 일이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이 밤에 어제의 불면을 생각하며 김윤배 시인의 '설레임만이 당신과 나 하나이게'라는 시를 읽고 어제의 마음을 연장해 본다.
설레임은 멀고 내 그리움의 시작은 어둠에 묻혀 지나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수십 겹 무게보다 무겁습니다 그리운 것은 당신 몸속에 낸 무수한 나의 길입니다 길목마다 진달래 꽃물 번지고 길 끝 뫼봉 높아 백두며 묘향이며 온전한 설레임이었습니다 침엽수림 사이에 빛나던 깊이 모를 강물 위에 나 뗏목으로 누워 당신 기쁜 눈물 닿고 싶습니다 엇나간 불임의 세월 엮어도 그리움으로는 한 몸 아닙니다 첩첩한 설레임만이 당신과 나 하나이게 하는 빛입니다
- 김윤배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