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기회

2024, 어떻게 기억하시겠습니까?

by 효희



어제 굳은 마음으로 다짐하고도 새벽에는 엄마랑 피자를 먹고 피의 게임을 보고 폰게임을 하다가 아침 9시 반에야 잠들었다.

그래도 고무적인 사실은 2시에 일어나서 바로 우체국에 갔다는 사실!


2시에 깬 건 연유 덕분이다.

물 달라고 깽판을 쳐서 일어났는데 물그릇이 없었다.

뭐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물그릇을 패다 못해 내팽개쳐서 내 방문 앞까지 데굴데굴 굴러와 있었다.

진짜 웃기는 강아지…


오늘은 어제보다 의욕이 조금 더 있다는 점이 다행이다.

검정치마 조휴일은 쫄보라서 사게 된 중국제 초록색 기타를 보면서

‘기타가 이렇게 후지면 그래도 좋은 노래 하나는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똥기타~’하고 둥당거리다가 멜로디를 하나 만들었다.

그 코드 진행은 수정을 거쳐 내가 너무 사랑하는 노래, ‘Everything’이 된다.


초록 기타는 이후 임무를 다하고 세팅까지 마친 후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그 초록 기타가 다시 쓰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조휴일의 일화에서 그가 했던 생각을 오래 들여다본다.

도저히 쓸 수 없을 만큼 후지고 구린 기타. 사놓고도 ‘똥기타’라고 부르며 웃던 기타.

조휴일은 그 기타를 보면서 ‘그래도 좋은 노래 하나는 만들어야지.

이 기타가 쓸모없이 버려지진 않게 해야지’라고 생각한 거다.

나는 그 생각에 걸려 넘어진다.


그냥 버려야만 하는 건 없구나. 결국엔 내 선택이구나.

너무 뻔해서 이미 알았지만 귀찮고 싫어서 고개 돌린 사실을 나는 또 이렇게 마주치네.

그러고 보면 내가 쓴 글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ㅇㅇ아, 망가진 건 고치면 되는 거야.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말에 ㅇㅇ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묻는다.

‘그럼 이미 죽은 건?’

그건 ㅇㅇ도 방법이 없다.

이미 죽은 걸 다시 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죽지만 않으면 기회는 있다는 거다.

죽어버리지만 않으면 우리는 고쳐질 수 있다.

얼마나 깊은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든, 내가 지금 얼마나 엉망이든 간에.

오래 걸리더라도, 길만 찾으면. 일어나면. 달라지고 싶으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선택이니까.

이 개똥 같은 11월을 이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어떻게 쓸지는 내 손에 달렸다.

견고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견고하고 단단한 과거를 현재의 한계를 깨는데 쓸 수는 있다는 소리.


넘어진다면 손에 뭐라도 쥐고 일어서면 된다고 말하던 20대의 내게 고맙다.

너 자주 넘어져서, 넘어질 때마다 하나씩 쥐고 일어나 줘서, 30대의 나는 조금 덜 넘어져. 가진 것도 많아. 고맙다.

나 대신 자주 넘어지고 자주 울어줘서, 그때 내가 없었어서 미안해.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이게도, 20대의 어린 나에게는 30대의 조금 더 자란 내가 없었지만,

30대를 이제 막 헤쳐가는 나의 옆에는 생채기 나고 멍투성이면서도 해맑게 웃고 있는 내가 서있다.

내가 나의 뒤에 서있다는 게, 내가 누구보다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나의 지원군이라는 게 고맙고 안쓰럽고, 좋다.


그리하여 12월. 서른한 살.

아무리 우겨도 만 서른 인 30대의 연말이 왔다.

많은 일이 있었던 2024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냐고 물으며, 은근슬쩍 옆에 앉아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그러니까 이건 내가 올해를 어떻게 기억할지 결정해야 하는 이야기의 끝자락.

인터렉티브 컨텐츠처럼 마지막 선택지가 둥둥 떠있는 눈앞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5년 간의 장기 연애를 끝낸 해.

첫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는 회사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한 해.

하고 싶은 걸 원 없이 해보겠다고 선언한 해.

처음으로 큰 파티를 열어보고 많은 사랑을 받은 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엉망으로 취하고,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집에서 엉엉 울기도 한 해.

그럼에도 충만히 행복하다고 말해본 해.

행복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얼 하고픈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해.


그러니 엉망으로 기억할 수는 없다.

그 모든 찬란한 순간들에 행복했으므로. 슬픔과 후회와 부끄러움도 모두 행복의 일부로 기억할 것이다.

하나하나 잘 닦아서 2024라는 상자에 차곡히 담아 예쁘게 리본 묶어둬야지.

나중에 들여다보면 나의 올해가 나를 얼마나 바꿔놨는지, 얼마나 뜨겁게 행복하게 해 줬는지 알게 될 것이다.

분명 겨울이 지나갔지만,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날도 있었지만,

나는 올해를 여름으로 기억할 것이다.


‘넌 내 모든 거야.

내 여름이고,

내 꿈이야.

넌 내 모든 거야. 나 있는 그대로 받아줄게요.’

평생 날 이렇게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맸는데, 이제 알겠다.

날 이렇게 사랑해 줄 사람은 나여야 한다.

그러니 올해는 발견의 해.

끝맺음의 해.

시작의 해.

영원히, (영원을 믿지 못하는 내가), 영원히 기억할 여름.

연말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기회가 왔다.

이 마지막 페이지가 부디 다시 행복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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