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3년에 한 번씩 토익시험을 본다. 시험은 보지만 정기적으로 토익점수 업데이트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따로 활용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따로 공부를 하지도 않는다.시험 준비라고는 컴퓨터용 사인펜을 챙기는 정도? 그런데 이습관적 응시를 15년이나 계속하고 있다. 첫 시작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들리고,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으면 토익 점수가 얼마나 나올까?'
순수하게 궁금했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궁금증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파릇하다 못해 푸르르던 대학교 신입생 때.당시 하숙생이던 나는영화광 친구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그때만 해도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와 미드를 빌려보던 시절이었는데 친구집에는 큰 티브이와 비디오 플레이어가 갖춰져 있었다. 우리는 자주 비디오점에서 영화를 빌려 봤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언니가 미리 빌려놓은 "SEX AND THE CITY" 비디오를 보게 됐다. 운명처럼 말이다.
제목부터 말 그대로 너무 노골적으로 야했기에 볼까 말까 망설이던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너... 감당할 수 있겠니?"
도대체 뭘 감당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앙칼지게 대답했다.
"물. 론."
목젖이 튀어나오도록 침을 꼴깍 눌러 삼키고 비장하게 세모버튼을 눌렀다. 오... 그때 나의 감상평을 짧게 요약하자면 '홀리몰리 과카몰리'. 이불속에 숨어서 맛봐야 할 금단의 열매를 이렇게 유쾌하고 시크하게 드러내놓고 맛보다니!
인사이드 아웃이 내게 내 안에 기쁨이와 슬픔이가 산다는 걸 가르쳐줬다면, 섹스 앤 더 시티는 내 안에 사만다와 샬롯과 미란다가 살고 있으며, 그래도 역시 나의 정체성은 캐리인 것 같다는 깨달음을 줬다. 알이 깨지고 세상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미드 < SEX AND THE CITY >의 주인공 캐리
그렇게 파격적인 미드 입문식을 치른 나는 그때부터 수많은 미드를 가리지 않고 즐기기 시작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드라마를 시즌제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흡이 긴 작품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는 딱이었다. 어떤 드라마는 10년이 넘게 시즌이 계속되기도 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굉장히 신선했다. 프렌즈, 모던 패밀리, 빅뱅, 왕좌의 게임, 프리즌 브레이크, 크리미널 마인드, CSI, 멘탈리스트, 덱스터, 로스트, 브레이킹 배드, 오렌지 이스 더 뉴 블랙, 굿 닥터, 너의 모든 것... 수많은 미드들이 나를 거쳐갔고, 나 또한 나이가 들었다.
미드를 정말 질리게 보다 보면 우연히 영어가 조금씩 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때, 우연이거나 말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 보다 보면 높은 확률로 영어가'진짜로'조금씩 들린다. 이건 학습을 위한 미드 시청과는 다른 개념인데, 노출 빈도가 잦아서 생기는 박리다매식 리스닝이랄까? 나는 때때로 그걸 경험했고, '예전의 나보다 귀가 좀 트였구나.'라고 내심 짐작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짐작'이 '실제'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토익시험을 접수했다.
물론 토익시험 점수와 실제 영어 실력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단기간에 토익시험 점수를 올리는 수많은 요령들이 존재하고, 또 이것이 실제로 통한다는 점이 이를 증빙하거니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외국인의 토익점수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토익시험은 나의 짐작을 실체화해 줄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그렇다면 그 결과는?
나의 토익시험 성적은 미약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이상하게 확 떨어지지도 않고, 확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15년 전의 실력보다는 분명 많이 나아진 것도 같은데, 진폭은 나의 기대를 못 따라간다. 그래도 큰 불만은 없다. 지금 나의 영어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는 데 사용하고 있기에 점수가 기대를 따라오지 못해도 문제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문화, 예술을 즐기는 수단으로써 제 몫을 다하고 있달까? 그러다 최근,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강좌를 하나 신청했다. '영어로 배우는 작품'이라는 주제의 강좌였는데, 커리큘럼을 보니 내가 읽은 책과 영화들이 꽤 많았다. 마음이 조금 설레었고, 첫 수업일이 다가왔다.
모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이제는 명예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사님은 나의 예상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다.
"우리가 애들처럼 무슨 학점 받을 것도 아니고, 영어 못해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편안하고 즐겁게 수업하도록 해요. 아침밥도 가져와서 드시고, 과자랑 차도 각자 가져와서 드세요. 나이스 투 밋 츄!"
매우 프리한 진행이었다. 내공이나 관록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강의실을 휘감았다. 예상을 빗나간 첫 번째 순간이었다.
오늘은 영화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를 음미하고 토론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실상은 미국의 역사와 하버드대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하버드대학교 투어를 한 것 같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예상을 빗나간 두 번째 순간이었다.시간은쏜살같이흐르기 시작했고 2시간의 강의시간이 채 30분도 남지 않았을 무렵, 아차 싶었는지강사님이 준비해 온 PPT를 급하게 넘기기 시작했다.
영화 < Love Story >의 한 장면
사랑하느라 바쁜 <러브 스토리>의 앳된 남녀 주인공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빠르게 화면을 넘기며 강사님이 말했다.
"이게... 이제... 이것들이 하는 짓이에요."
'이것들이 하는 짓? 이토록 파격적인 영화 소개라니...'
예상을 빗나가는 세번째 순간이었다. 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나이가 지긋하신 강사님이 백년천년 사랑할 것처럼 애달픈 젊은이들의 애정행각을 '이것들이 하는 짓'이라 표현하니, 연륜이 솔솔 첨가되면서 유쾌함을 더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수강생들이 공감의 박장대소했는데 대부분 연세가 많은 수강생분들이었다. 빠른 화면전환에 이어 러브스토리의 메인 테마곡이 재생됐다. 강사님은 눈밭을 뒹구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사님 표현대로 이것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면서- 다 함께 영화 주제곡을 불러보자고 제안했다. 노래라니... 예상을 빗나가는... 아니다, 이제는 숫자 세기도 힘들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을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연속적인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리바리하기도 했고, 화려한 애니메이션 효과로 인해 한 박자씩 늦게 나타나는 가사 때문에 어리바리해지기도 해서 가사도 모르는 이 노래를 도저히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련한 눈빛으로 노래를 따라 하시는 연세 지긋하신 수강생들이 꽤 보였다. 이 영화가 몇 년 전 개봉 50주년을 맞이했다고 하니 그때 그 시절에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을 법한 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러브스토리는 개봉과 동시에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끌었다. 오죽하면 개봉 당시에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은 볼 수 없는데, 그 이유가 영화가 너무 달콤해서 극장 안의 관객들이 다 녹아내려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을까? 그러니그 시절 이 영화를 공유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이영화가아주특별하게 남았을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빠져나와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곰젤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수업을 복기해보니, 방금 2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 한 편의 시트콤처럼 느껴졌다. 잠시 '그들만의 리그'에 발을 담그고 나온 느낌. 그들에겐 멀뚱멀뚱 두리번거리고 앉아있는,자신들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즐기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였을지도, 혹은 한껏 즐기느라 나 같은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강의계획서를 꺼내 강의 목차를 다시 들여다봤다. 레미제라블, 애나벨리, 어린 왕자... 목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여전히 가득했다. 그런데 쉴틈없이 예상을 빗나가는 수업 속에, 내가 그 작품들을 보며 나누고 싶은 얘기는없을 것 같았다. 고로 이 시트콤 같은 만남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가 보고 경험하고 온 것은 30년쯤 후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강사님이 < SEX AND THE CITY >를 들고 와서 "정말 속 시원하게 화끈하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며, 뉴욕을 거니는 캐리의 모습과 테마곡을 들려준다면나는 흥얼거리며 즐거워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