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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느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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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길온 Gilon Nov 17. 2022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

2022.09.24

    일기를 다시 써보기로 결심했다. 학생 때 항상 제 시간 안에 해치워야 되는 일종의 부담감으로서의 일기가 아닌 지금의 일기는 일종의 희망감을 가지고 써 내려가는 글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정신없이 오늘 하루도 보낸 나를 위해 한 템포 쉬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과 휴식을 적절히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롱런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들 많이 말하던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오늘은 선임중 한 명이 전역을 앞두고 전 포대원 다 같이 풋살로 마지막 안녕을 보내는 그런 날이었다. 이른 아침 10시부터 풋살을 즐겁게 했다.


    나한테 풋살을 그저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존재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를 항상 사랑해주던 부모님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기숙사 학교생활을 하게 됐다. 처음은 항상 미숙하고 힘들기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휴대폰 사용도 통제되고, 집도 2주마다 금, 토, 일 이렇게 3일밖에 갔다 오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스스로 어떻게 보낼지 결정해야 되는 시기를 일찍 가졌다. 수업이 보통 2시 반에서 3시 반 사이에 끝나서 나는 십중팔구 운동을 했다. 풋살, 농구, 족구 등 잘 갖춰진 운동시설 덕분에 친구들이랑 재밌게 땀 흘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학교를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다니는 동안 부모님보다 풋살 공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또한, 처음으로 내가 잘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았던 활동이기도 하다. 골대를 향해 공도 차지 못하는 옛날과는 달리 수많은 시간과 노력과 부상을 통해 실력을 갈고닦아서 지금은 어느 정도 볼은 찰 수 있는 정도다.


    어떻게 보면 풋살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오랜 친구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약속 거리이자 내가 뭘 처음으로 열심히 해봤던 기억에 남는 활동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의 오랜 친구 같은 풋살을 하다가 군대 동기들끼리 서로 말다툼을 했다. 한 친구가 실수를 할 때마다 다른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누구와 같이 못했다 이렇게 장난 섞인 말투로 얘기하다가 둘 다 화가 나서 글로 쓰지 못할 단어들이 오갔다.

일기를 쓰면서 생각해보니 우리는 신체적인 상해보다도 언어적인 폭력을 자주 하는 편인 것 같다. 신체적 상처는 치유가 돼도 마음의 상처는 회복이 더딘 것처럼 우리는 서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헐뜯고, 그리고 비난한다.


    개인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평가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장난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가야 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만 살 수는 없다. 학창생활 때도 나는 나의 주장이나 선호를 피력하다기보다는 다수의 좋음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결정하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싸우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의 이유일 수도 있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단지 빨리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내가 가장 맘 편한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다수와 함께 지낼 때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다수의 좋음을 추구하고, 남들보다 친구들의 장난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많은 친구들과 두루두루 별 탈 없이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던 방법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애들이 놀리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도 놀림으로 오는 스트레스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는 누적되기 때문에, 애들이 언어적 놀림을 하는 그 당시에는 괜찮았을지라도 결국 나중에 가면은 엄청 큰 눈덩이가 되어서 더 큰 후폭풍을 몰고 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여러 번 경험해본 결과 이것은 거의 진리인 것 같다. 스트레스는 제때 해소시켜줘야지 나중에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친구들의 장난을 받아치는 것 외에 다수의 좋음을 추구하는 행위의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나라는 사람의 모습이 희미해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가장 비로소 나일 때는 바로 선택이라는 행위를 시행할 때이다. 선택을 내리는 과정 속에 수많은 고뇌와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들 전부가 나라는 사람의 일정 부분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그 선택을 하려고 고민하는 것만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야기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친구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능동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일종의 반항과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선택은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항상 대가로 치르게 한다. 이 무거운 짐에 겁이 나서 선택의 주체를 타인한테 넘겨버리는 경우는 많다. 나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아무런 고민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지 가늠이 안된다. 고민은 항상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 끝에는 성취감이라는 일종의 보상도 수여한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은 모든 것이 정해지는 삶과 모든 것을 결정해야 되는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첫 번째 삶은 책임을 지지는 않지만 모든 결과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된다. 아마 최소한의 행복은 주어질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두 번째 삶도 마찬가지로 모든 결과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되지만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도 같이 매고 가야 된다. 과연 인간은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가?

 

    이 터무니없는 망상에 정답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 망상이 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조건이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핵심 내용이다. 앞에 언급된 두 인생의 차이는 책임을 가지고 선택을 내리는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선택의 주체자와 관련해서 이 두 가지 삶은 차이가 없다. 처음에는 다르다고 했다가 갑자기 다르지 않다고 해서 당황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여기서 내 개인적인 견해를 한번 주장하고자 한다. 두 번째 삶을 사는 주체자는 바로 자신이다. 첫 번째 삶을 사는 주체자도 바로 자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의 선택권을 타인에게 넘기는 사람은 자신이 더 이상 삶에 관해서 선택하지 않도록 선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선택을 대신 내려주고 그에 따라기만 하면 되지만,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다른 사람이 선택을 내리게 허락한 사람도 바로 본인 자신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선택이라는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존재라는 소리이다. 선택을 하던가. 선택을 안 하기로 선택하거나. 이 두 개의 옵션 중에서 무조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굴레에 빠진 존재와 같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냥 이 선택이라는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전역을 4개월 앞둔 현재의 심정에서 앞으로의 미래가 막막하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해 깊게 빠져있는 것 같다. 지금의 선택이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치니까 더 지금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 같다.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 과연 행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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