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종이 : 경로이탈 02

증명 없이 그냥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나요.

by Ondol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책에 파묻혀 산다고 했더니 "책 많이 읽어? 책 좋아해?"라고 돌아오는 말에 아니라고 답해버렸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열에 끼기엔 너무 부족한 독서량. 근데 골똘히 생각해 보니 왜 내가 좋아하는 거를 남한테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걸까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것도 안 읽어봤으면 독서가 취미까진 아니지. 이거 안 해봤으면 이걸 해봤다 말할 수 없지. 살짝 맛만 봤다고 하는 거지, 어디 가서 그렇게 얘기하면 그거 하는 사람들이 웃어.


이제 취미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걸까. 얼레벌레 살아가고 있는 나한테는 그 기준이 너무 빡빡하게만 느껴진다. 유명한 책은 안 읽어 봤지만 읽는 행위가 좋아서 독서가 취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은 언제 될 수 있는 걸까.


나한테 주어진 일을 내가 얼마만큼 처리할 수 있는가. 이 직무에서 일하기에 내가 적합한 사람인가. 내가 이 회사에 걸맞은 사람인가.


일은 능력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자꾸 증명해 나가야 한다. 자꾸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능하다면 해냄과 동시에 그 이상의 비전을 제시하면 더할 나위 없이 그 직무에 적합한 사람이자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그럼 회사에서만 그렇게 하면 되지 취미, 취향까지도 증명해 내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나답게 사는 것도 힘든데 다른 사람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처럼 수식어를 붙이는 행위를 잠시 멈추고 싶다. 그래서.. 증명 없이 그냥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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