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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l 25. 2023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정조 이산]  하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

그에 대한 수렴청정이 정순왕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정순왕후는 영조와 51년의 나이 차가 나는 계비이다. 그는 정조의 정학론과 달리 조정신료들을 노론 벽파 인물로 채우고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한다.     

천주교 탄압의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는 정서적 문제이고 다른 면은 정치적 차원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 문화를 부정하고 천주에 대한 기도만을 강요하는 것은 수백 년간 유교 생활에 젖어있던 대다수 조선인들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정치적 이유라 함은 주로 젊은 남인 계열의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노론 벽파에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 탄압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정적의 제거라는 이중적 효과를 노리게 되는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는 종교적 탄압이자 정치적 정적 제거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배필로 김조순의 딸을 간택하게 되고 이로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세도정치의 폐해는 한 가문에 의하여 국정이 좌지우지됨으로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부패가 심각해지는 데 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이에 따라 잇속을 차리고자 지위의 고하를 떠나 민초들에 대한 수탈은 그 도를 더해 간다.

삼정三政이라 일컫는 국가 세입의 골격은 토지의 결에 의하여 징수하는 전정田政, 장정현역병외의 장정에게 과하는 군정軍政, 봄에 곡식을 대여해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환곡還穀인데, 그 부패의 실상은 아래와 같다.

전정의 경우 진결(陳結 황폐화되어 못쓰는 땅에 대한 징수), 은결(隱結 대장에서 누락된 전답에 대한 징수)등을 횡령하고, 정액 이상의 세를 과하는 도결都結도 있었다.

군정은 족징(族徵 도망자나 사망자의 밀린 납세 금을 친족에게 물게 하는 것), 강년채(降年債 연로자에게 고의로 나이를 줄여 징수하는 것), 마감채(摩勘債 역을 면하게 되는 군포)등으로 착취하였다.

환곡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반작(反作  허위 문서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증우(增佑 상사가 명한 공정가보다 고가로 매출하는 것), 반백(半白 반분은 겨를 섞는 것), 분석(分石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불리는 것)등 여러 방법으로 중간착취를 했다.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그들은 떼를 이루어 도적 화적 반란군의 형태로 정치궤도에 직접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홍경래의 난'이다.   

  

한편 왕실에서는 정비의 몸에서 순조의 외아들인 효명세자가 태어난다. 그리고 1819년(순조 19) 세자가 11세가 될 때 부사직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니 풍양 조씨의 또 다른 세도정치가 예견되었다.

순조의 잦은 병치레로 효명세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한다. 효명세자는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결단력이 있어 조선왕조는 실로 오랜만에 성군의 통치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는 급사를 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순조가 다시 통치를 하게 된다. 이에 원손인 이환을 세손으로 정하게 된다.     

1834년 순조의 환후는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여 11월 34년간의 치세를 마감한다.

보령 8세의 왕세손이 순조의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헌종이다.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가 대왕대비의 몸으로 수렴청정에 나서게 되는 순간이다.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이고 대비가 되는 헌종의 생모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헌종의 중전 간택이 관심사로 떠오른다. 결국 왕실의 웃전인 순원왕후의 뜻대로 김조근의 여식이 간택되고 안동 김문의 영달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헌종 9년 정비 효현왕후가 춘추 16세로 승하를 한다. 그리고 광산 김문의 김재청의 딸이 경빈으로 책빈된다. 헌종의 건강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즈음 경빈 김씨가 어렵사리 잉태하여 출산을 한다.

옹주의 탄생이었지만 이틀 만에 세상을 저버린다. 헌종의 정신적 충격은 그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고 더불어 조선 해안가에 수시로 출몰하는 이양선은 그를 심각한 피해망상으로 몰고 간다.

1849년 23세의 나이로 헌종은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8살 보령으로 즉위하여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유년기를 보냈고 소년기와 청년기는 두 외척의 발호 속에서 지냈다. 3정이 무너져 백성들은 도탄에서 헤어나지를 못했고 이양선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세력들이 해안 지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왕위를 이어갈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P/S 

1. 순조조 동안 백성에 대한 수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였고,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백골징포白骨徵布)과 갓난아이(황구첨정黃口添丁)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포를 감당할 수 없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심지어 정약용도 애절양(哀絶陽)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 현문;현감이 근무하는 관아의 문     

군인 남편 못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남절양;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이정; 지금의 이장 정도되는 직위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후략>     

2. 천주교 전파에 있어 제사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사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에서 처음 전교를 하던 예수회에서는 그 나라의 풍습을 감안하여 제사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풍습을 그대로 수용했었다. 뒤에 들어온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에선 이를 엄격히 규정지으니. 서로 교리 상에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바티칸에서 조상의 제사를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제사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였으며 수많은 생명이 순교든 희생이든 안타깝게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변경이 된다. 

“전교지 나라의 문화 풍습을 존중하여 전교하라!”.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 500년 제 2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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