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 니체의 철학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만은 다시금 그의 사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고 상식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어지러운 현재 우리가 희구하는 초인(超人)이 과연 내 생전에 등장할 것인 가하는 좌절어린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니체로부터 얻고자 하는 조그마한 바람 또한 있었음이었어라.
니체는 이 책을 아포리즘(주변 설명 없이 짧고 간결한 형태로 진리나 교훈을 표현하는 방식)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써나간다. 비유와 은유 그리고 상징으로 점철되어 있어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주해를 들여다보고서야 간신히 한 페이지를 넘길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바처럼 이것은 니체가 쓴 제 5의 복음서로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다음으로- 인간을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인데, 시종일관 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은 통렬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다. 그 중에서 기독교의 원죄(原罪)는 인간을 신의 지배하에 복속시키고 인간 스스로의 능멸을 조장하며 인간 본연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데 재갈을 물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현세와 천국(배후세계)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을 철저히 부정하며 현생에 오롯이 매진할 것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크게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1. 영원회귀(永遠回歸)
용어만 들으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불교의 윤회사상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윤회와 관련이 없고, 예를 들어 대자연을 보면 사계절이 순환하고 지난봄에 꽃이 핀 자리에 다시 같은 꽃이 피듯이 우리의 인생도 이처럼 반복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이번 생을 마감한 후 다음 생에 태어난다 해도 우린 어쩌면 후회와 좌절 속에서 다음 생도 이번처럼 그렇게 마치게 될 것이라는 대전제(大前提)를 우린 가정해야 한다.
우리 인생이 실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또 다른 삶이 재차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번 생과 별 다름이 없이 지나갈 것이라는 전제가 중요한 점이다. 그럴 공산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짐과 후회 그리고 새로운 다짐이 반복되는 시간으로 다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봐야 별 다를 것이 없는 허무주의의 최극점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린 기독교가 제공하는 배후세계(천상세계)의 유혹에 빠져 현실을 등한시하거나 막연한 믿음으로 현실과 타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 같은 허무주의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2. 초인사상(超人思想)
그것은 초인(超人)이 되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벗어나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만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초인이 되는 것이 유일한 솔루션이 된다.
그렇다면 니체가 제시하는 초인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 神이 죽었음을 선언하라.
이는 기존 가치 체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특히 기독교적 도덕이나 관념과 같은 외부에서 부여된 가치에 의문을 던지고 나 자신에 대한 주체적 사고에 빠져들어야만 한다. 신이 없어진 자리에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선 초인이 되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여 인류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주인의 도덕(Master Morality)를 수립하여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예의 도덕은 주인의 도덕에 대해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善"은 겸손, 동정, 희생과 같은 가치로 정의되고, "惡"은 강함과 지배를 상징하는데, 니체는 특히 기독교적 도덕이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도덕이 인간의 본능적 에너지와 창조성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이러한 노예적 가치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善은 강함, 고귀함, 창조적 에너지이며 惡은 나약함과 무력함이라고 하는 주인적 도덕)를 창조하는 초인(Übermensch)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를 이르는 것인데 인류 최초의 일신교(一神敎)중 하나이자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의 창시자를 내세워 이원론적 종교관의 종말을 선언하는 극적인 효과를 의도하고자 책자의 제목에 짜라투스트라를 등장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초월(self-overcoming)을 추구하라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인간은 넘어서야 하고 넘어져야 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강을 가로지르는 밧줄과 같아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초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나는 극기를 통한 자기 극복이라고 해석하였고, 그 과정을 굳이 함축한다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한다고 이해하였다.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한때 권력에의 의지라고 표현되었던 것은 최근 힘으로 고쳐 부르기로 되었으며 니체가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각자에게 내재된 에너지와 능력 등을 의미한다. 모두가 보유하고 있는 내면의 힘을 분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능동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예술, 학문, 정신적 성장 등 개인의 잠재력을 실현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모든 생명체는 ‘힘을 추구하는 의지’를 갖고 있기에 “생명의 창조적 충동”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니체 사후(死後)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유고를 편집하면서 힘에의 의지를 권위주의적인 해석으로 퍼트렸고 히틀러의 나치즘에 악용되는 사례가 있었으나, 니체는 국가를 “차가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반 민족주의적이었고 전체주의 사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강조하였다.
- 아모르 파티 (Amor Fati) : 운명애(運命愛)
우주만물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무쌍하지만 그 나름 질서를 유지해 가듯이 우리 인생의 삶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부침 속에서 고통, 실패, 인간의 불완전함을 포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영원회귀에 따라 내 삶이 똑같이 반복될지라도 나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나의 삶을 맘껏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나의 주체적 삶을 위해 슬픔과 좌절까지도 내 인생의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자세를 강조한다.
허무한 삶에 보기 싫은 것이 가득하고 떨쳐내고 싶어도 떨어지지 않는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삶이다. 부질없기도 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자가 하나도 없지만, 이 마저도 사랑하며 여한이 없는 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니체가 쇼펜하우워와 친밀하게 지냈지만 결별하게 되는 허무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상기에 언급한 니체 사상의 기본 골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챕터가 ‘세 가지 惡에 대하여’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 악으로 육욕, 지배욕, 이기심(아욕我慾)을 언급했는데, 이는 기존 도덕 체계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던 것들이다.
하지만 니체는 성적 욕망으로 평가되는 육욕을 ‘생명력의 표출’로 이해하였고, 신체와 감각을 경시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즉 사랑이란 영혼의 순수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과 결합된 “총체적 생명의 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를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라 하였는데 이를 혼돈과 창조의 원동력으로 해석하였고, 억압된 욕망이 오히려 병리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지배욕(Will to Power)은 단순히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기극복(Self-Overcoming)과 창조를 위한 근본적 동력으로 이해하였다. 예술가의 창작 열정, 철학자의 진리 탐구, 개인의 성장 모두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며, 피동적 순응을 거부하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초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기심(Selfishness)을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라고 보았으며, 희생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태도는 오히려 노예도덕으로 치부(置簿)하였다. 진정한 이기심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려는 의지로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 삶’을 의미한다.
이는 상기 아모르 파티(amor fati)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되며 외부 규범이 아닌 내적 충동에 따라 삶을 창조하는 목표를 가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 철학의 핵심은 “神의 죽음”이후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주체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욕망의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예술적 철학적 성취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즉 성적 욕망은 예술적 열정으로, 지배욕은 자기극복으로, 이기심은 자율적 삶의 실천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그러니 너희는 과거의 가치를 넘어서, 너희 자신의 길을 걸어가라!”
오뉴월 무더위에 양 쪽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구절이다.
오늘도 난 나의 길을 가야겠다.
*P/S
1. 니체가 주창한 초인(超人)사상은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는 Superman 혹은 Overman 등으로 표현하였고 이를 일본에서 초인으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그대로 도달한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그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어 원어 그대로 위버멘쉬를 쓰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육사의 詩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과 다른 의미이며 인간의 기존 가치와 도덕을 초월하여 자신의 삶과 가치를 주체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이상적 존재를 위버멘쉬라고 한다.
2. 이십대부터 부친의 영향으로 인해서인지 니체 사상에 관심이 많았고 심지어 25년 전에 인터넷 유료 강의를 들었던 기억도 난다. 과격하다할 정도로 혁신적이고 중세적 시대타파의 선봉에 선 인물이지만 급진적인 그의 사상은 가벼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면 능지처참에 처해졌을 운명이었으리라. 그의 사상은 종교가 가진 모호성과 선동적 자극을 통한 부정한 행위에 경종을 울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 회복을 주창하는 르네상스 정신과 병행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부각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들로 하여금 긍정적 에너지를 되찾게 만들어 준다. 환갑이 지난 지금 그의 영원회귀 사상과 위버멘쉬를 향한 도전은 마치 나에게 환생의 새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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