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실로 몇 년 만에 페이스북에 들어가 봤더니 2020년도에 포퓰리즘에 관하여 쓴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포퓰리즘의 의미는 지금도 시시각각 그 빛과 형태를 달리하고 있으며 최근에 내가 새롭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그 기원을 카이사르 당시부터 유래된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원로원과 민중의 로마라는 의미)에서 카이사르가 민중파를 대변하는 자로서 원로원으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시점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opulism이란 무엇인가 ? 제 1 탄.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참으로 많은 가설들이 있어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대중인기영합주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용어로 언론들이 호도하고
이를 정치권이 사용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나라 곳간을 국민에게 열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마치 포퓰리즘인 것처럼 잘 못 인식을 하게 금 되어 있다.
예전부터 포퓰리즘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를 민중주의 대중주의 혹은 인민주의라고 해석해왔다.
민중이 들어가고 인민이 거론되면 빨갱이로 인식하는 선입견이 있어-이는 주입식 교육에 따른 폐해의 하나이기에 이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용어에서 풍기는 어감 상 대다수의 시민들은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게 금 조작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먼저, 포퓰리즘의 대척점에 있는 반대어로 무엇이 있을까?
이는 엘리티즘(Elitism)이다.
엘리티즘이란 엘리트주의 즉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상이다.
사회적 엘리트에는 과연 어떤 존재들이 속하게 되는 것인가?
대표적으로 검사와 판사 등의 법조인이다.
그리고 의사 집단이다.
거기에 경제를 주무르는 재벌과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방송 언론계들이다.
엘리트 조직은 달리 말하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포퓰리즘은 사회 기득권 세력이 좌지우지하던 힘과 권력을 민주화된 사회에서 대중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이념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퓰리즘을 선과 악, 좌파와 우파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 같은 포퓰리즘적 정책과 노선이 그 색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포퓰리즘 정권의 탄생을 촉진하는데 가장 근원적 요소 중의 하나인 “힘의 공백”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 등은 그 초석을 깔았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간 정권은 기득권 세력의 허점이 여지없이 드러남으로써 힘의 공백을 초래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이루어진 people power에 의하여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일련의 정책,
- 공수처 설치를 통한 검찰의 개혁
- 언론과 결탁한 재벌들에 대한 규제
- 어용 노조로 인하여 차별받는 비정규직에 대한 정당한 처우 개선
- 공공 의료 기관을 통한 의료 개혁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번 의사 파업 사태 역시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적 정책에 따른 불협화음의 하나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
공교롭게도 포퓰리즘적 정부는 상대적으로 좌파적 성격을 띤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기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민중을 등에 업기 위해서는 분배 정책에 무게 중심을 둬야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을 진일보된 민주화 과정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 급진 좌파들의 공산화의 과정인 것인지 이에 대한 평가는 각 개개인의 사회적 이념에 대한 깊이와 개인의 삶의 반영 속에서 각자가 판단할 사항이다.
단, 포퓰리즘적 성향을 가진다고 해서 절대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고, 이것이 마치 사회주의적 변화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편협한 사고의 울타리 내에서 모든 사안을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 트럼프와 오바마의 설전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트럼프와 오바마는 서로 ‘자신이 진정한 포퓰리스트임을 주장한다.
오바마는 인권 변호사로서 인종 갈등 해소와 소외된 계층에 대한 배려를 통한 진정한 아메리카의 행복을 추구하는 포퓰리스트라고 하는 반면,
트럼프는 뜯뜨미지근한 오바마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미국인의 일자리가 실종되었고 대외적으로도 미국의 협상력이 축소되었기에 미국 국민을 최우선으로 놓는 정책이 진정한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서로 자신이 진정한 포퓰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모양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실상은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용어를 상대를 흠집 내기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이를 언론에서 받아 낭비벽 심한 졸부의 소비 행태인 것처럼 교묘히 포장하는 경우도 있어왔다.
실제 그러한 면이 없지 않다.
포퓰리즘이 성행했던 중남미 국가들의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는 곳에 따라 레몬이 탱자가 된다고 했다.
21세기 들어 엄청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가장 다이나믹한 국가를 손꼽는다면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성장을 경제개발계획 수립 년도인 1962년부터 근 60년 가까이 쉼 없이 달려온 나라가 또 있던가?
Populism이란 무엇인가 ? 제 2 탄.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애기할 수 없는 이유로는 포퓰리즘은 이념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념으로 판단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이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느 한 쪽에 치우쳐져서
바라보는 시각이지 객관적인 이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포퓰리즘을 이해하기 위하여 포퓰리즘이 성행할 수 있는 환경과 그 주요 공통점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제 1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적 힘의 공백/ 혹은 균열이 있을 때 포퓰리즘은 생성된다.
2. 나라별로 민중의 공통된 감성에 호소하여 결집시킬 수 있는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3. 민중을 자극하는 적절하고도 선동적인 캐치프레이즈(terminology)가 있어야 한다.
4. 리더의 카리스마.
대략 상기와 같은 4가지 요소가 적절히 갖춰져 있거나 갖춘 상황에서 포퓰리즘은 꿈틀꿈틀 싹을 틔운다.
광의의 의미에서 보면 모든 정권 특히 세계사적으로 모든 혁명과 성공한 쿠데타는 거의 포퓰리즘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가장 빈번히 차용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처럼 대중을 자극하고 하나로 단합시킬만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제 1 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포퓰리즘은 좌익 세력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익 세력들도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포퓰리즘적 정권으로 등장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포퓰리즘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바라볼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그릇되고 편협된 의식으로 내 머리가 세뇌 당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제 한국사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포퓰리즘을 얘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현대 한국사의 대표적 포퓰리즘은 바로 박정희정권과 문재인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이 포퓰리즘이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상기에 언급한 포퓰리즘의 4대 요소를 가장 충족하는 정권이 박정희 시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 이후 4.19 학생 운동으로 국정 능력을 거의 소실한 사회적 공백 상태로 연명하던 차였다.
이때 박정희는 5.16쿠데타로 집권하였으며 이는 안정을 희구하는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후 박정희는 일련의 민족적 정기를 불어넣는 정책으로 국민적 호응을 받은 정권이다.
대표적으로 사회 정화와 부패 척결은 물론이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움으로써 6.25전쟁의 참상을 기억으로부터 소환하였으며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새마을 운동의 추진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국민교육헌장,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추진,
비록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 딴 것이기는 하지만 10월 유신을 통한 한국적 민주주의 등으로 계몽 운동과 함께 민족적 정서를 한껏 자극하는 포퓰리즘적 성향이 강한 정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라고 해서 반드시 허황된 공약이나 정책으로 인기를 얻는 정권으로 국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박정희 정권은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평할 수 있다.
반면에 현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민중의 힘을 등에 업고 세워진 정권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5%대로 전형적인 힘의 균열과 공백 상태가 이어진 것이었다.
보수의 궤멸이라고 하지만 이는 보수층에서 하는 자위적인 표현인 것이지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보적 성향의 문재인 후보는 인권 변호사다운 슬로건으로 민중에게 어필한다.
“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집권 후 “적폐 청산”을 기치로 하여 일련의 사회 정화 작업에 몰두하고, 친노동, 서민 정책의 일환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 개선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중남미에서 좌초했던 포퓰리즘 정권의 경제 정책을 답습한다.
즉 좌파적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진보 정권이냐 보수적 정권이냐 혹은 현 정권의 호불호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정확한 의미는 상실한 채 무작정 상대를 경멸하거나 매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함부로 내갈기는 언론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 스스로가 자각하여 사고의 폭을 넓힘으로써 흑백논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은 보통 비밀 선거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발현되는 정치적 현상이다.
이는 민주 정권이냐 독재냐, 진보냐, 보수냐, 성공적이었나. 실패였나를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
그 정치적 현상 자체가 기존 기득권 세력의 독점적 권력을 얼마나 대중 혹은 민중에게 이양하고자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앞으로의 사회는 구조적 다양성과 기술 혁명, 여권 신장, 환경 문제, 대두되는 신민족주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뉴노멀의 정착 등으로 정치권에서는 확증 편향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는 발언과 정책 심지어 가짜 뉴스 등이 난무할 것으로 보인다.
장년층의 막바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한 자식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자 발광을 해도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뇌는 쪼그라들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