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세상을 만나는 원칙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원칙
약 10여 년 전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우리나라에서만 120만 부가 팔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전 세계 판매부수가 200만 권인데 반해 국내에서만 약 60%가 팔렸고 거래처 사무실에 가든 친구 집에 가든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국민 도서가 된 적이 있었다. 현재까지 국내 누적 판매부수가 200만 권에 달한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솔직히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세대들은 그 책을 들여다보면서 적잖은 실망감(?)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꼭 집어 얘기해주기보단 정의에 대한 더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이클 센델의 스승이기도 한 존 롤스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의(定義)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피력함으로써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이론가로서 유명하다.
이 책은 존 롤스의 제자인 황경식 교수가 롤스의 정의론을 설명한 해설서에 가까운 작품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롤스의 이론에 보다 쉽게 다가가도록 설명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작년 12.3 친위 쿠데타를 겪은 지금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정의에 대한 가치관을 보다 공고히 갖고 현실을 타개하면서 미래를 향한 국가적 동력을 마련해야할 시기라고 생각되어 롤스의 정의론을 찬찬히 되짚어보고자 한다.
롤스는 정의의 문제를 자원의 공정한 분배에 있다고 보았다. 공정한 분배에 대한 방식과 절차를 논하기 위하여 그의 기본적인 철학과 사고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이라 하겠다.
그는 사회진화론에 대립하여 사회연대주의를 신봉하는 입장이다.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상으로, 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빈부 격차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은 자원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복지나 재분배 정책에 부정적이며,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사회연대주의는 사회라는 생명체는 분업과 협동이라는 연대를 통한 상호 의존 관계 속에 결합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온갖 도구로부터 종교, 철학, 문예, 과학, 정치,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현대 문화는 먼 조상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적 산물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존 롤스는 개인에게 주어진 천부적 재능(innate talents)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우연적 요소로 간주했다. 그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출한 능력(우수한 지능, 훌륭한 외모, 뛰어난 체력 등)과 환경(부유하거나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거나 상속을 받는 등)을 부여받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결정된다는 점에서 정의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운(運, luck)에 따른 것이니만큼 도덕적으로 정당한 정의를 논의하려면 운에 좌우되지 않는 중립적 입장, 즉 운의 중립화(neutralizing luck)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운의 중립화는 운의 평등화 내지 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롤스는 운을 사회적 공유 자산 내지 집단 자산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정의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도덕적 직관을 갖고 접근하고자 한다. 이는 상기 언급한 사회연대주의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롤스는 운의 중립화를 위한 기본 마인드와 원칙 등을 정립하였고 이를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으로 체계화함으로써 근대 경제 및 복지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정의론의 핵심적인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과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원초적 입장이라는 말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 능력, 성별, 인종, 가치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기본 규칙을 결정한다고 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사용되는 장치가 바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무지의 베일은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특성과 사회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로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공정한 원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배경 등을 감안하지 않고 선택을 할 때 가장 공정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2. 롤스가 주창하는 기본 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 그리고 차등의 원칙이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라 함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를 동등하게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회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양심의 자유, 종교 및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 표현의 자유 등을 포함하며, 이 자유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제한될 수 없으며 사회 전체의 복지나 효율성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차등의 원칙은 롤스가 주창한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그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지만 ‘불평등은 오직 그것이 가장 불리한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차등의 원칙을 구성하는 키워드는 최소 수혜자(least advantaged)와 최소 극대화(maximin)이다.
최소 수혜자라는 말의 뜻은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수혜를 가장 적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천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지도 못했고 사회적으로 지위나 상속에 있어서 환경적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계급으로 나는 이해하였고, 통상적으로 사회 저소득층이라고 해석해도 무리 없으리라 생각된다. 즉 재원의 분배에 있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정의롭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휴머니즘적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정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롤스는 상기의 최소 수혜자 혜택이라는 점과 더불어 최소 극대화(Maximin)의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소 극대화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 용어인데 Maximin은 Maximum of Minimum의 줄임말로서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받게 될 이익의 최대화(Maximize the minimum gain)를 지향하는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의 질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한 자들에게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단순한 철학 이론을 넘어, 실제 사회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복지국가의 설계, 재분배 정책, 기회의 평등 보장 등에서 그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1. 보편적 복지 제도
-국민건강보험제도: 모든 국민이 소득과 무관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로서, 롤스의 차등의 원칙에 따라 최소 수혜자의 삶의 질을 보장하려는 정책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일정 소득 이하의 국민에게 생계비를 지원하는 제도 역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2. 무상 공교육
-초·중등교육의 무상 제공은 롤스가 강조한 기회의 평등 원칙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정책으로서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교육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3. 누진세와 재분배 정책
-고소득자에게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누진세 구조는,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최소 수혜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된 제도이다.
-실업급여,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 등도 경제적 약자의 회복 기회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롤스의 정의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롤스의 이론을 요약하면, 어떤 제도가 상위 계층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더라도 그로 인해 하위 계층의 삶도 함께 개선된다면 그 불평등은 정의롭다고 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공정한 불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고 실용적인 정의관으로 평가받고 이를 정책으로 시행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정의롭다고 스스로 자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을 계승 발전한 마이클 센델의 정의관은 공공의 善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앞으로 보다 심도 깊은 담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P/S
이전에 난 Populism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롤스의 정의론은 사회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에 대한 정의 실현 차원의 호혜적 정책을 구상하기에, 자칫하면 기득권 세력에 대립하는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부정적 기류에 휘말릴 우려가 있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제도 수립에 있어 많은 비난을 받곤 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Populism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쟁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사회복지 정책을 포퓰리즘과 구별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1. 재원 마련이 합리적인가?
2. 실제 최소 수혜자에 대한 것인지 이를 구실로 삼는 것인지?
3. 국가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감당할 선인가?
4. 선거에 임박하여 득표를 위한 정치적 슬로건인가?
5. 장기적 사회적 효과를 고려하고 있는가?
6. 공정한 절차를 거쳤는가(국회, 공청회, 전문가 분석 등)?
상기와 같은 판단 기준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뿐 절대적 분별력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 않는다. 주권재민의 생각,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각자가 명확한 기준을 갖고 합리적 사고를 키워나가는 것만이 책임 있는 국민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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