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에서 유방(劉邦)까지
진시황과 유방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연령 차이는 얼마나 될까?
진(秦)나라 다음에 한(漢)나라로 이어지니까 한 세대 정도의 나이 차이일까?
실은 두 사람의 연령차는 고작 3살이며 진시황이 3년 연상이다.
그렇다면 유방과 경합을 벌인 항우(項羽)와의 연령차는 얼마나 될까?
항우는 유방보다 24살 어리다. 연령상으로 보면 삼촌과 조카 간에 목숨을 건 한 판 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초·한 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의 연령 차이를 알고서 그들의 행각을 추적해보면 색다른 감흥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 시대의 역사적 역할과 시대적 흐름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당시의 주요 인물 연령과 주요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사(李斯, BC 280) → 진시황(BC 259)보다 21세 연상
- 이사는 진나라의 법가 개혁을 주도한 정치 철학자이자 실무가로, 진시황이 즉위하기 전부터 국가 체제를 설계한 인물이다.
- 진시황은 이사의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전국 통일을 실현하였고, 이 둘의 관계는 사상가와 실행자, 즉 이론과 실천의 연결 고리로 볼 수 있다.
2. 진시황(BC 259) → 조고(趙高, BC 257)가 2세 연하
-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지만, 조고는 환관이자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서 황제의 수레를
관리하는 고위직 신분임(현직으로 보면 경호실장 정도의 직위).
- 조고는 진시황 사후 권력 공백을 틈타 이사와 함께 쿠데타 정권을 장악함.
- 이 나이 차이는 조고가 진시황의 정치적 후속 세대가 아니라, 동시대의 그림자 권력이었음
을 엿볼 수 있다.
3. 조고(BC 257) → 유방(BC 256)이 1세 연하(동갑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음)
- 유방은 조고의 폭정과 진나라의 붕괴를 목격한 세대로, 민심을 얻어 반란을 일으킴.
- 거의 같은 세대지만, 출신과 정치적 방향성은 정반대: 조고는 내부 붕괴의 주역이었고,
유방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로 나아간다.
4. 유방(BC 256) → 항우(BC 232)가 24세 연하
- 항우는 유방보다 한 세대 아래지만, 진·초 전쟁에서는 연합군의 상장군으로서 유방의 강력
한 라이벌이자 유방의 상관으로 등장.
- 이 나이 차는 항우가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정치적 노련함은 부족했음을 암시함.
- 유방은 경험과 실용주의로 한나라를 창건했고, 항우는 감정과 명분에 치우쳐 패배함.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전국칠웅(全國七雄)중의 하나였을 때의 지역 구도를 미리 파악하는 것은 향후 전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진나라는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 대륙의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초나라는 중남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북부는 조나라, 중부에는 한나라, 위나라, 동북부에는 제나라가 있었고, 북부와 요동 지역은 연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나타나듯이 합종연횡(合縱連橫)이란 말이 있는데, 합종은 초나라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합하여 진나라에 대응하는 전략을 의미하는 것이고, 연횡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견제하고자 동서로 연합하는 모양새를 일컫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순자의 제자들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각각 합종과 연횡의 설계자이자 외교가로서 같은 문하였지만 정책과 철학은 달랐다. 특히 장의는 연횡의 설계를 하고 추진 과정은 개별 협상을 통하여 진나라에 맞서지 말고 협력할 때 그에 대한 보상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진나라의 군사적 위용을 바탕으로 협박과 회유를 함께 함으로써 한, 조, 위, 연, 초, 제를 하나씩 점령해가기 시작한다. 이를 잠식(蠶食: 누에가 뽕잎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형상)한다고 표현한다.
진시황(본명 영정)은 제위에 오른 이후 약 10년간 동부로 진출하면서 하나씩 잠식하여 결국 B.C 221년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통일의 과업을 이뤄낸다.
진시황은 B.C. 210년 순행 중 급사하기까지 약 12년간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였고, 그의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중국 최초의 통일 (기원전 221년)
• 전국시대의 6국(한·조·위·연·초·제)을 차례로 정복
• ‘왕(王)’에서 ‘황제(皇帝)’로 칭호 변경 → 황제 제도의 시작
2.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확립
• 군현제 도입: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현으로 나누어 직접 통치
• 법가 사상 채택: 엄격한 법률과 통제를 기반으로 국가 운영
3. 표준화 정책
• 문자 통일: 소전체(小篆)를 공식 문자로 지정
• 도량형 통일: 무게·길이·부피의 기준을 전국적으로 통일
• 화폐 통일: 반량전(半兩錢)을 전국 공통 화폐로 사용
4. 분서갱유(焚書坑儒)
• 사상 통제 정책: 유가 경전을 불태우고, 반대하는 학자들을 생매장함.
• 법가 중심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지식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행위.
5. 대규모 토목 사업
• 만리장성 축조: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기존 성벽(조나라, 연나라)을 연결·확장
• 직도 건설: 수도 함양에서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도로망 구축
• 아방궁 건설: 진나라의 웅장한 궁전, 후대에 전설처럼 회자됨
• 진시황릉과 병마용: 사후 세계를 위한 거대한 무덤과 도용(陶俑) 군대
6. 순행과 불로장생 추구
• 전국을 순행(5차례)하며 통치 기반을 다지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방사(方士)들을 파견
• 서복(徐福)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전설도 이 시기 등장
7. 사후 혼란과 진나라의 몰락
• 기원전 210년 사망
•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의 음모로 태자 부소가 자결, 호해가 이세황제로 즉위
• 폭정과 반란으로 인해 진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멸망
진시황은 통일과 제도 개혁의 상징이자, 강압과 통제의 아이콘으로 평가되고, 그의 유산은 한나라를 비롯한 후대 제국의 통치 모델로 작동하게 된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리카이 위안의 동 작품은 진시황이 210년 급사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시황의 사망은 동북부에 위치한 사구라는 곳에서 일어나게 되고, 유서에는 장남인 부소에게 황위를 위양하는 것이었으나 조고와 이사는 부소가 북경 지역으로 파견된 것을 기화로 내용을 조작하여 그의 동생 호해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시도한다.
시황제의 시신을 수도 함양으로 옮기면서 그들은 시신 썩는 냄새를 위장하고자 생선을 담은 수레를 주변에 배치하는 등 온갖 수작으로 시황제의 시신을 함양으로 이동하는데 성공을 하게 되고, 호해는 꼭두각시 황제로 남게 되어 실질적인 정권은 조고와 이사 두 사람 손에 주어지게 된다.
진 황제 2세가 된 호해는 형인 부소와 상장군인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는 위조된 유서를 내리고 나머지 형제자매 또한 모두 제거하기에 이른다.
진시황은 아방궁과 만리장성 구축, 전국도로망인 직도 건설등 대규모 공사에 수많은 인력을 거주지에 상관없이 부역에 동원하는 등 시황제 강압과 폭정에 원성이 자자하던 차에, 그의 죽음은 곳곳에서 민란과 거병을 유발하게 된다.
반란의 신호탄이 된 것은 진승과 오광으로서 특히 진승은 진현을 수도로 삼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였으며 왕으로 자처했다. 장초라는 국호는 초나라를 확장한다는 의미로 초나라의 부흥과 확장을 꾀하고자 했다.
반진(反秦)의 기치를 내걸자 각지에서 천하가 호응하고 인심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세 달 사이에 항량(항우의 숙부)과 항우는 강동에서, 유방은 패현에서, 영포 오예는 번양에서 기병했다.
진승의 장초정권은 연전연승으로 세력을 확대하지만 진나라의 장함(章邯)이라는 특출한 장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그러나 육국(六國)은 진나라에 점령당한 영토에서 복국(復國)을 시도하여 종실의 후예들을 각각 옹립함으로써 소위 포스트 전국시대가 재현된다.
초나라는 회왕, 위나라는 위구가 위왕으로, 한나라는 한성, 제왕(齊王)에는 전담이 왕이 되고, 조헐이 조왕(趙王)으로, 한광이 연왕(燕王)으로 복국이 이루어지지만, 진나라의 강력한 세력에 이들은 초나라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진나라와 연합군의 대결이라 하겠다.
포스트 전국시대의 분수령은 거록대전이라고 불리는 거록성 전투이다.
장함과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위세가 대단하여 조나라는 수도 한단까지 내어주고 거록성에 피신하여 초나라의 지원군을 고대하는 신세가 되었다.
초 회왕은 송의와 항우를 장군으로 삼아 파견하는데 총지휘관인 송의가 조나라 군사를 구하기는커녕 진과 조나라 군사들이 서로 싸워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쓰기에 급급했다. 이에 화가 난 항우가 상관인 송의를 처단하고 군사를 이끌고 거록성으로 진입한다.
장하강(漳河江)을 건너 거록성을 눈앞에 둔 항우는 극심한 병력의 열세를 파악하고서 군사들에게 '3일치 식량만을 남긴 채 솥을 깨부수고 배를 가라앉히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로써 퇴로가 없는 결사의 의지를 다지게 한다(이것이 바로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유래가 된다). 이 같은 결의하에 죽음을 불사하는 초나라군은 거록성을 포위하던 진나라 군대를 초토화시키며 대승을 거두게 되고 장함의 오른팔 왕리는 전사한다. 이에따라 항우의 용맹함과 위세에 모든 나라 군사가 복종을 하게되고 항우는 연합군의 총지휘관인 상장군으로 임명된다. 동시에 진나라의 총책인 장함은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편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는 삼두체제를 구성했던 이사, 조고, 호해 간에 알력이 생긴다.
2세 황제 호해는 국사에는 관심이 없고 향락에 빠져 조고에게 모든 일을 일임한 상태였다. 조고는 권력을 독점하고자 이사를 모함하여 호해로부터 이사를 제거하는 하명을 내리게 한다.
조고는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고자 사슴을 궁정에 들여오게 하고 이를 말이라고 부른다. 조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정도의 위세를 부리게 되는데 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가 된다. 진나라는 조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고 반란군의 기세는 높아만 가는 형세가 지속된다. 이사의 지원을 받던 장함은 이사가 제거됨으로써 본국으로부터의 지지는커녕 거록대전 패배에 대해 문책을 받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장함은 항우와 비밀 교섭을 가지게 되고 항우는 장함에게 진나라를 정복하면 그 영토에 옹왕으로 책봉할 것을 약조한다.
항우의 약속은 초 회왕이 공개적으로 약조한 것을 뒤집는 것인데, 회왕은 진나라 함양이 있는 관중 지역을 먼저 장악하는 자에게 진왕(秦王)의 자격을 부여하고 예전의 칠국 체제로 회귀한다는 것을 공언하였었다.
이 같은 약조 하에 유방의 군사는 서진을 하고 항우는 거록성으로 향하게 된 것이며 회왕의 속셈은 항우를 견제하고자 유방을 관중으로 출병토록 한 것이었다.
관중으로 진입한 유방은 함양의 함락을 시도하고 있었고 형세가 다급해진 조고는 유방과 협상을 시도한다. 관중 지역을 분할하여 각각 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호해까지 제거한 조고는 시황제의 조카 영영이 왕위에 오르자 오히려 그로부터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영영은 유방에게 옥새를 바치며 투항을 한다.
유방은 거의 무혈입성으로 함양을 손에 넣는다. 이로써 유방은 회왕의 약조에 따라 진나라 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갖추게 된다.
함양을 정복한 유방은 궁궐은 물론 일체의 약탈행위를 금하고 민정을 살피는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약법삼장은 후에도 한나라 통치의 근간이 되는 간단한 원칙을 이름이다.
1.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상해를 입힌 자는 형벌에 처한다.
3. 도둑질한 자는 처벌한다.
장함의 투항을 얻어낸 항우는 뒤늦게 관중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는 유방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치솟게 만든다.
전체 연합군의 상장군인 항우로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이에 따라 무력으로 유방을 제압하고자 한다. 항우에 비해 절대적으로 군사적 열세에 있는 유방은 관중 지역으로 진입한 항우의 군사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유방의 생사여탈권이 항우의 손에 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이때 유방의 진영에 있는 장량이 나서서 항씨 집안의 최연장자인 항백과의 옛인연을 앞세워 진귀한 보물로써 뇌물을 쓰며 항우와 유방의 관계를 유화적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이에 항백의 주선으로 인해 유방과 항우는 홍문연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고 항우 진영에 있던 범증은 이를 기화로 유방을 제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항우는 손위 어른인 항백의 체면과 더불어 예전에 유방과 함께 진나라에 대적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추억들을 회상하는 사이 유방이 교묘히 자리를 벗어남으로써 홍문연의 자리는 무사히 마감되고 만다. 이 대목에 있어 당사자 간에 24년이라는 연령 차이가 작용하는 형언할 수없는 심정적 요소가 작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홍문연 회동은 항우의 어리석음인지 하늘의 도움인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운명의 여신은 유방의 편에 있었던 것이리라.
범증은 홍문연의 자리에서 유방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후환으로 남을 것이라 탄식한다.
이렇게 해서 항우는 실질적으로 전국을 다시 지배하는 패권(覇權)을 잡게 된다. 그로인해 항우는 진왕(秦王)이 아니라 패왕(覇王)이 되어 전국을 분봉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한다.
먼저 초나라 회왕을 형식적으로 승진시켜 의제(義帝)라 존칭하고 남초 지역의 침현으로 옮기도록 하여 새로운 천하질서의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복국한 전국 시대의 칠국(초, 진, 조, 위, 한, 연, 제)을 진 제국의 군의 단위에 따라 새롭게 19개의 왕국으로 분할 재편했다.
항우는 기존 초나라를 서초, 구강, 형산, 임강의 네 나라로 분할한 뒤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었다. 구강왕에는 초나라 장군 영포, 형산왕에는 초나라 장군 오예, 임강왕에는 초나라 장군 공오를 봉함으로써 이때부터 우리는 항우를 서초패왕이라고 부르게 된다.
진나라는 옹(雍), 새(塞), 적(翟), 한(漢)의 네 나라로 분할하고, 지난 약조에 따라 정함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한왕에는 유방을 봉한다. 한왕은 진나라의 한중, 파, 촉의 세 군을 영유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우린 유방을 한왕(漢王)이라 부르게 된다.
초나라와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들도 11개의 군으로 나누어 각기 제후를 봉함으로써 19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겉으로는 항우의 1인 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패권을 거머쥔 항우와 웅지(雄志)를 품고 있는 유방 간의 격돌이 충분히 예상되는 형국으로 접어들게 된다.
진시황의 전국 통일과 멸망 그리고 포스트 전국시대까지 약 17년간의 시간은 사상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는 유가사상(儒家思想)은 뒷전으로 밀리고 질서와 법치를 강조하는 법가사상이 득세를 하게 되는 흐름이 있었다.
이는 사회적 풍토를 공리주의(功利主義)적 실용사고를 따르도록 하는 바, 여기에서 논하는 공리주의는 공리주의(公理主義)가 아닌 자신의 이익과 공명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의미한다. 즉 개인적 입신양명을 우선시하고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이라고 하는 냉철한 사회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이사는 한비자와 함께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한비자는 진시황의 눈에 들어 등용이 되지만 이사의 모략으로 인해 옥중에서 자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사는 진시황의 유언을 조고와 함께 조작하는데 동조하고 호해의 방탕함을 방치하기도 한다. 대의명분보다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데 삶의 목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조고는 이사를 제거하고 호해까지 처리한 후 유방과 밀약을 통해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는 인물이었다. 유방 또한 대세가 유리해지자 조고와의 약조를 헌신짝처럼 버린다.
장함은 나라가 무너져가자 항우에 투항하여 진나라 영토의 일부를 받아 옹왕으로 봉해진다.
항백은 뇌물에 눈이 멀어 항우와 유방 간의 화해를 주선하고 어떡하든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실리를 챙기기에 급급한 인물이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충과 성이라는 개념보다 자신의 앞가림이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가 진작되기 마련이다. 음모와 모략은 생존과 출세를 위한 필수 요건이 되어 버린다.
* P/S
1. 리카이 위안의 작품 진붕(秦崩)은 여기에서 끝나고 후속작인 초망(楚亡)으로 스토리는 이어진다.
2. 진나라 장수 장함(章邯),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 고려시대 장군 강감찬(姜邯贊).
이들의 공통점은 이름에 같은 한자인 감(邯)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장함을 혹자는 장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도 한단은 모두들 한단이라고 부른다.
한국사 이야기의 저자 이이화 선생은 감(邯)자 의 경우 이름과 지명의 고유 명사에는 ‘한’이라고 하는 것이 맞고 그래서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내용을 동 저서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다른 자료에는 장함이 아니라 장한이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한단이라는 지명도 고유 명사인 만큼 장한, 강한찬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이에 대한 학계의 해석이 자못 궁금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