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에서 한신까지
항우에서 한신까지
동 작품은 전편前篇인 진붕(秦崩)과 한 세트인 셈이다.
진붕에서는 유방이 한왕漢王으로서 포스트 전국시대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고, 초망은 유방이 항우를 무너뜨림으로써 진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패왕(覇王)이 된 항우는 진나라 붕괴이후 대륙을 19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으로 분봉(分封)하였고, 유방은 옛 진나라의 영토 중 서남부에 해당하는 파巴, 촉蜀 그리고 한중을 포함하는 지역에 한왕漢王으로 봉해진다.
기존 6국의 왕실과 진나라 타도에 공을 세운 측근들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분봉하는데, 그 평가 기준은 앞서 언급된 거록대전에 참전 여부 그리고 진秦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기 위해 관중으로 함께 진격했는지가 관건이었다.
이 같은 분봉은 기존 6국의 왕실과 신흥 제후들 간에 알력이 없을 수가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에 만족하기 보단 상대와 비교 평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기에 폭풍전야와 같은 평온이 잠시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천하통일의 웅계雄計를 간직하고 있던 유방은 한중에서 관중으로 진출하고자 시도하는데, 항우가 유방을 견제하고자 포진했던 옹(雍)나라의 장함과 새(塞)나라의 사마흔 등이 차례로 격파 당한다. 이는 모두 한신(韓信)의 지략에 힘입은 바 큰데, 항우의 진영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여 방황하던 한신을 장량이 간곡히 설득하여 합류함으로써 유방의 꿈은 날개를 달게 된다.
항우가 이를 진압하고자 할 즈음 서초국의 동북부에 위치한 옛 제나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제나라 왕족인 전영은 셋으로 나눠진 분봉에서 자신에게 영토가 할당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제왕(濟王)으로 봉해진 전도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한다.
한나라 유방과 제나라 전영의 반란 중에서 항우는 지역적으로 근접한 제나라를 먼저 진압하고자 한다.
항우와 제나라는 구원(舊怨)이 있는데, 거록대전을 앞두고 항우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송의를 죽이고 군사를 준동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항우는 제나라에 승상으로 초빙되어갔던 송의의 아들까지 죽인 바 있어 제나라에서는 항우를 무도한 자로 낙인찍을 수밖에 없었다.
진영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팽월과 손을 잡아 서초국의 후방을 괴롭힘으로써 항우는 제나라의 싸움에서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항우가 제나라와의 싸움에 몰두하는 사이 유방의 군사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항우의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급기야는 서초국의 수도인 팽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승리에 도취한 유방은 안일한 마음으로 주연에 빠져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사이 팽성 함락의 소식을 접한 항우는 한나라 군사의 보급선인 팽성의 후방을 3만 정예부대로 급습하여 유방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유방으로서는 두 번째 맞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월등히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급습을 당하고 보급선까지 차단되자 유방은 사력을 다하여 탈출에 성공하지만 10 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여치), 자식들 모두를 항우의 포로로 남겨두는 신세가 된다.
이때부터 형양을 중심으로 한나라와 초나라는 일진일퇴의 형국으로 지루한 장기전에 돌입하는데, 한신은 자신이 군사를 끌고 북방 지역부터 점거해가는 전략을 전개한다. 한신은 타고난 군사적 기질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조나라 지역과 연나라를 통합하여 세를 불리고 제나라를 상대로 전진해 간다.
이 즈음 漢나라는 두 번의 조약을 배신함으로써 대세로 자리 잡아 가는데, 하나는 역이기의 희생에 따른 것이다.
제나라에 외교 책사로 파견된 역이기는 제왕濟王인 전광을 설득하여 유방의 편에 합류하도록 한다. 제나라가 군사를 물리고 퇴진을 할 때 한신은 이를 알면서도 강공을 펼쳐 제나라 군사를 무참히 무찌른다. 세 치 혀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전공戰功이 아니라는 논리를 피면서 한신은 제나라를 손에 넣게 되고 이 와중에 역이기는 전광의 분노를 사 팽형(烹刑 솥에 삶아 죽이는 형)을 당하게 된다. 이는 역이기에 대한 한신의 시기와 견제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한신의 작전이 주효하여 한나라 군사는 조, 위, 제나라를 점령한 후 팽성을 향해가고 있었다. 동북부에서 내려오는 한신의 군사와 형양으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유방의 군사, 팽월은 북중부에서 그리고 항우를 배신한 구강왕 영포의 군사는 남부에서 초나라를 공략한다. 그리고 유방은 '항우의 10대 죄목'을 발표함으로써 한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의 명분을 선포한다. 그 내용은 함축하는 바가 많아 아래에 옮긴다.
“항우는 10가지 큰 죄악을 범했다. 애초에 나와 항우는 회왕이 ‘먼저 관중으로 들어간 사람을 관중왕에 봉한다’고 선언한 바에 따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파촉과 한중으로 옮겨 한중왕이 되게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죄악이다. 항우는 회왕의 명령을 사칭하고 경자관군 송의를 죽이고 군권을 탈취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거느렸다. 이것이 두 번째 죄악이다.
항우는 거록에서 조나라를 구하는 임무를 완수한 뒤 군사를 거두어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스스로 각 제후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중으로 진격했다. 이것이 세 번째 죄악이다.
회왕과의 약속에는 진나라로 들어간 후 폭행과 약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항우는 관중의 진나라 궁궐을 불태웠고 진시황의 분묘를 도굴했고, 진나라의 재물과 보물을 긁어모아 자신이 차지했다. 이것이 네 번째 죄악이다. 또 진왕(秦王) 자영이 성문을 열고 투항했을 때 항우는 잔혹하게 자영을 죽였다. 이것이 다섯 번째 죄악이다.
진나라 군사가 안양에서 투항하고 원수洹水에서 맹약을 맺었는데도 항우는 포악한 속임수로 신안에서 진나라 장졸 20만 명을 생매정해서 죽이고, 단지 세 명의 장수만 왕에 봉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죄악이다.
항우는 천하 분봉을 주재하면서 가장 좋은 땅을 각국 장수에게 나눠주고 옛 임금들은 궁벽한 땅으로 좌천시켜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도록 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죄악이다.
항우는 의제(회왕)를 축출하고 팽성을 강탈하여 도읍지로 삼았다. 또 한왕韓王의 영토를 박탈하고 위나라 영토를 병탄하는 등 여러 곳의 땅을 탈취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죄악이다. 항우는 사람을 보내 의제를 비밀리에 강남에서 살해했다. 이것이 아홉 번째 죄악이다.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가 그 군주를 시해했고, 이미 항복한 병졸을 도살했다. 또 정치를 주관하면서 공평하게 하지 않았고, 약속을 주재하면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으니 너의 대역무도한 죄는 천하에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합하면 너 항우의 열 번째 죄악이 될 것이다.”
유방과 해하에서 일대 결전을 준비하던 항우는 인질로 잡힌 유방의 가족까지 내세워 협박을 한다.
이에 유방은 외교 책사 후공을 파견하여 항우로 하여금 인질을 풀어주고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조약의 내용은 홍구(鴻溝)를 중심으로 양분하여 동은 항우가, 서는 유방이 지배한다는 내용이었다.
강화조약에 따라 항우는 유방의 가족을 풀어주고 전선에 있는 군사들에게 철수 지시를 내린다.
가족이 무사히 귀환하자 유방은 한신, 팽월, 영포 등 전군에 총공격을 명하고 항우의 군사는 대패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한나라의 두 번째 배신이다. 이것은 대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해하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항우가 진영을 둘러보는데 한나라 군사들 사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실은 한나라군의 적지 않은 수가 유방을 따라간 초나라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초나라 포로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초나라 군사들의 심리적 위축을 의도한 것인데,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나온다는 것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경우를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항우는 사랑하는 부인 우희(虞姬)와 함께 하는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읊조리는데 이것이 패왕별희에 나오는 해하가라는 작품이다.
해하가(垓下歌)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騶不逝(시불이혜추구서)
때가 불리하여,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이를 어찌 할 것인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나약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28명의 남은 기병과 함께 오강(烏江)으로 피신한 항우는 자결을 앞두고 비통한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군사를 일으킨 이래 오늘까지 8년을 지나는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나를 막아선 자는 모두 격파했고, 격파한 자는 모두 복종시켰다. 나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기에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결국 이곳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나를 망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명문세가 출신으로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항우는 일개 협객에 지나지 않던 유방의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해는 東에서 떠서 西로 진다.
지동설(地動說)을 알면서도 우린 그렇게 말하고 생각한다.
태양은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고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항우의 마지막 말이 초한지에 나오는 어떤 고사성어(故事成語)보다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과연 나를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일 것인가?
* P/S
1. 이 책의 작가 리카이 위안은 진나라 이후 6국의 복국(復國)을 두고 포스트 전국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진 이후에 6국 부활, 19개의 제후국 그리고 한나라로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려 했으나, 내 생각에는 네오(Neo)-전국시대라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한 용어가 아니가 싶다. 왜냐하면 ‘Neo-’는 ‘새로운 형태의 재현’을 뜻하는 접두사로, 전국시대의 정치적 DNA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항우·유방의 패권 경쟁, 육국의 독립적 행동, 합종·연횡의 외교술은 전국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이 반복된 것이며, 이는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구조적 복귀이므로 post가 아닌 neo라는 접두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확한 것이라 생각된다.
2. 한나라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 장량, 한신을 꼽는다. 여기에 건국사걸이라면 진광에 의하여 팽형을 당한 역이기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역이기(酈食其)는 모사로서 유방에게 다양한 계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자신의 지혜로써 계책을 내고 직접 수행하여 진류현을 얻어냈고, 낙양으로 몰려 방어에 집중하려던 유방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성고와 형양을 탈환하도록 건의했다. 그가 일찍 죽지 않고 재능을 제대로 발휘했다면 건국 사걸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많다.
3. 동 작품은 천하통일이후 한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한신은 과하지욕(跨下之辱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의 당사자로서 유방에게 있어 최고의 공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이거의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강공을 펼쳐 제나라를 제압한다. 그리고 스스로 제왕(濟王)이라 칭하며 한나라 본국에는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청한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사회에서 그것도 전시 상황에서 무례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방은 가왕이 아니라 왕으로 봉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유방이 느끼는 감정은 괘씸한 것 이상의 불쾌함이었겠지만 "새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해 한신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결국 한신은 토사구팽의 전형으로 비참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이 주는 우리말 어감은 욕심慾心이 과過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