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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김형곤 지음)

-링컨 리더십의 본질

by 이병철

-링컨 리더십의 본질


얼마 전 숙독한 “위험한 미국사”에서 김봉중 교수는 링컨의 공화당이 어떻게 현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어버렸는지 의아해 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의 경제 정책에 관해서 “세계 경제의 지각 변동”이란 책을 통하여 나름 분석해 보았다.

시간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미국의 남북전쟁을 이해하는 것이 미국 역사의 발전 과정과 현재의 정치 판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미국 역사의 흐름을 조망해보면 앞으로 미국이란 나라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그에 관한 직관을 얻고자 이 책을 택하여 보았다.


미국 남북전쟁의 중심에는 애브라함 링컨(1809~1865)이 있다. 하지만 전쟁의 발발을 막고자 가장 노력한 인물이 링컨이기도 하다.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국 연방은 갈라져서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이 연방을 탈퇴하면서 소위 남부연합(Southern Confederation)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는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링컨의 등장 이전부터 미국 연방은 북부와 하남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링컨의 당선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연방(聯邦)을 유지하는 것의 필요성을 모두가 인정하기에 남북 간에 힘의 균형을 이루고자, 노예제와 관련하여 찬성과 반대하는 지역을 공히 반으로 나누어 형식적으로나마 힘의 균형을 이루어 미연방의 존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 1820년)이다.

상, 하원에서 노예제 찬반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핵심이다. 이는 초기의 대표적인 균형 협정으로 남북 갈등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1850년 타협(Compromise 1850)이다.

멕시코 전쟁 이후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마련된 협정으로서,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편입하는 대신 남부에 유리한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을 강화했다. 도망노예법이란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던 미국 남부 주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도망친 노예를 체포하여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의무화한 연방 법률을 의미한다.


그리고 캔자스-네브라스카 법(1854)이 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미주리 타협을 사실상 무효화하며 주민주권에 따라 노예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소위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라 불리는 폭력적 충돌이 발생했고 남북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남북전쟁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구조 문제 그리고 문화적 갈등 또한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경제적 구조라고 하는 것은 북부 지역은 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노예제에 반대하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하며 제조업 분야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즉 임금 체계에 바탕을 둔 산업구조와 노예제는 병립할 수 없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기독교적 가치와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간의 보편적 권리에 위배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갈등 또한 작동하였는데, 북부 인들에 있어 남부 인들은 게으른 주인과 질 떨어지는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와 무능하고 가난한 백인으로 구성된 지역으로서 프로테스탄트 근로 윤리와 공정 경쟁의 이상을 완전히 위반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반면에 남부 인에게 북부 인들은 자유시민의 덕성과 독립과 자유는 인종적으로 저급한 노동계급이 엄격한 통제 아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는 위선적인 탐욕가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요인은 노예제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구조에 따른 발전 방향에 대한 인식 차이, 생활양식의 차이에 따른 문화적 갈등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더불어 당시 상황의 이해를 위하여 남부와 북부 지역의 산업 및 경제력의 비교를 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 마디로 남북의 차이는 어른과 아이라고 할 정도로 비교 대상이 안 되는 현격한 경제적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즉 북부 지역의 경제력이 남부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인구수는 2,200만 명 vs 900만 명, 노동자 수는 130만 명 vs 11만 명, 산업 생산량은 150억 달러 vs 1억 5천만 달러, 철도 길이 2만2천마일 vs 9천마일, 은행 예금액 1억9천만 달러 vs 4천7백만 달러 등으로 애당초 전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감히 추측컨대 남부 연합의 계산은 연방 분리를 주장해서 자신의 산업 기반인 노예제를 지속 운영하도록 하고 더구나 관세를 인하하도록 하여(*북부 산업을 보호하고자 높은 관세를 적용하던 시기)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공산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고자 했을 것이며, 연방 탈퇴라는 강수를 두면 링컨도 어느 정도 협상의 자세를 가질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링컨의 입장은 매우 강건했다. 남부연합의 요구를 들어주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의견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무꾼의 딸을 사랑하는 사자가 있었지요. 그 사자는 나무꾼의 딸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나무꾼은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이 딸을 해칠 수 있다고 반대했습니다. 이에 사자는 자신의 이빨을 뽑아버리고 다시 나무꾼에게 간청했습니다. 이제 나무꾼은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딸을 해칠 수 있다고 했어요. 이에 사자는 자신의 발톱도 뽑아버렸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사자를 잡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솝 우화를 말하며 남부연합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연방 유지와 함께 섬터 요새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섬터 요새(Fort Sumter) 사건은 남북전쟁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린 사건이자 도화선이었고 이 요새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 입구에 위치한 연방군 요새였다.


섬터 요새로부터 시작된 전쟁은 전면전으로 전개되어 남북 간에 치열한 전쟁으로 확산되었고, 약 4년간 진행되는데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초기 전투 (1861~1862)

- 불런 전투(제1차 Bull Run): 북군이 패배함으로써, 전쟁이 장기화될 것임이 예고되었다.

- 북군은 해상 봉쇄(애너콘다 플랜)를 통해 남부 경제를 압박하는 반면,

- 남군은 로버트 E. 리 장군의 지휘 아래 버지니아 전선에서 선전한다.


2. 전환점 (1862~1863)

- 앤티텀 전투(1862): 북군이 남군의 북침을 저지, 링컨이 노예해방선언(1863) 발표함으로써,

전쟁을 단순한 연방분리 문제에서 노예제 폐지라는 도덕적 투쟁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 게티즈버그 전투(1863): 북군 승리, 남군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되는 전환점이 된다. 승리를 확신하게 된

전투이며 링컨의 유명한 연설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87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이 대륙에 자유를 신봉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헌신하는 새로운 국민을 창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신봉하고 헌신하는 국민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전쟁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하나님의 가호 아래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총력전과 남부 붕괴 (1864~1865)

- 북군 그랜트 장군과 셔먼 장군의 총력전 전략: 셔먼의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으로 남부 지

역의 모든 산업·교통망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 1865년 4월,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고,

- 애포매톡스(Appomattox)에서 로버트 E. 리 장군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기나긴 전쟁이 종결된다.


결과적으로, 연방의 승리에 따라 미국은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고 미연방이 존속된다.

그리고 1865년 헌법 제13조 수정안으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됨과 동시에, 남부 사회와 경제를 재편하는 재건 시대(Reconstruction)가 개막된다.


정리하면, 남북전쟁은 섬터 요새 포격으로 시작해 게티즈버그 전투와 셔먼의 총력전으로 전세가 북군에 유리하게 기울었고, 결국 1865년 남군 항복으로 끝나며 미국의 통일과 노예제 폐지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한 계기였지만, 그 피해 또한 상당하였다.


1861~1865년 4년 동안 총 사망자 수가 7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미국 인구(약 3,100만 명)의 2%가 넘는 수치이다. 여기에 부상자는 약 40만 명으로 이들 중 다수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약 400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면서 남부는 노예라는 재산이 사라져 자본 가치가 약 40억 달러 이상 손실되었고, 셔먼 장군의 바다로의 행진(Sherman's March to the Sea)등 북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철도, 공장, 농장, 가축 등이 대규모로 파괴되었고 양측의 직접적인 전쟁 지출은 당시 화폐 가치로 약 33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세대가 대규모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해, 수십 년간 국가의 경제 및 사회 발전에 큰 공백이 생겼고, 정치적으로도 남부와 북부 간의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분열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현대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링컨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링컨은 연방을 보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을 선택했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처음에는 군사상 필요에 따라 노예해방령을 발표했지만 궁극적으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보장되도록 한 것은 링컨 개인의 목표가 아니라 팔로어들과 함께 한 공동의 목표였다. 일부에서는 그를 독재자나 전재군주로 비난하기까지 하지만 목표 달성을 위한 링컨의 노력은 단호했다.

“국가를 잃으면서 헌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합니까? 일반적으로 볼 때 생명과 팔다리는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팔다리를 절단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이와 달리 팔다리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행위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팔다리를 절단하는 행위가 헌법을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게 함으로써, 이것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합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S

서두에 적은 바와 같이 링컨의 공화당이 어떻게 현재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었는지 의아해 하는 이유가 궁금하였기에 시대를 거슬러 남북전쟁에 관하여 소상히 알고 싶었다. 둘로 나누어진 미국, 트럼프의 지지율 36% ...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비록 성격은 완연히 다르다할지라도, 미국 남북전쟁 발발 이후 90년 후에 우리 한반도에도 남북전쟁이 있었고, 링컨에 대한 저격이 있었듯이 이념 갈등에 따른 김구 암살도 겪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전 12.3 불법계엄사태가 있었으며 둘로 쪼개진 나라를 봉합하는 과정에 지금 우린 처해 있다.

계엄이 있었던 오늘 밤 링컨의 리더십을 되짚어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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