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슨시Decency
미국살이 8년하는 동안 몸에 밴 습관, 무의식 같은 것들이 미국의 영향을 받아 바뀐 것들이 있다. 나는 한국을 떠나올 때, 한국이 너무 답답해서 떠난 것도 있어서 내가 자라난 문화를 다르게 볼 수 있었고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박사과정에서 신선하게 여겨서 받아들인 사상이 있었다. 프랑스의 ‘몸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다. 그는 인간이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몸에 새겨진 습관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의식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근대주의 사상까지는 ‘아는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금과옥조라서, 이성의 교육이 중요했다. 가르치면 배운대로 행하겠지였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존재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이성만이 결정의 요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 욕구,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인지하게 되는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반복되는 행위가 우리의 의식, 무의식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몸 긍정(sarcophilic)의 철학은 내가 내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좀 더 의식적으로 살펴보도록 안내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람은 감정, 의지, 이성으로 이뤄진 존재라는 점을 유념하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여지가 많아진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 다른 몸의 문화와 행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다른 행습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개인에 대한 존중'이다. 이를 통해 더 낫고 여유있고 품위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쉬운 사례를 들자면 ‘문’이다. 우리는 문을 열든지 닫든지 그것이 어떤 문화적 함의를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 사람에게 문은 개인의 사적 공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식이다. 어떤 문이든지 닫혀있으면 반드시 문을 두드려서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아무리 아이방이라도 벌컥 열기부터 해서는 안된다. 닫혀있으면 ‘나는 지금 나만의 시간, 혹은 중요한 일을 하는 시간이니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뜻이 강하다. 반면에 문이 열려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개인 사무실이 쭉 늘어서 있는 경우에, 대화중이거나 전화회의 중이 아닌 다음에야 문은 거의 대부분 열려있다. 그럴 때는 얼마든지 대화나 다른 상황에 열려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또한 문은 언제나 다음 사람을 위해 잡아주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남의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필요나 안전에는 보지 않고도 재빨리 느끼는 편이랄 수 있다. 등에 눈 달린 듯 따라 들어오는 뒷사람을 반드시 인지한다. 그렇게 누가 앞에서 문을 잡아주면 유아차나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매우 편리하고 안전하다.
미국 사람들은 개인주의가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이 해논 것이나 한 일에 대해 청하지 않은 의견제시를 하거나 만져서 변화를 주는 일은 금기다. 열어놓은 문을 보고 ‘아유 추워 왜 이렇게 해놨어’이러면서 문을 닫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뭐든 누가 어떤 이유로 해놓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것은 ‘눈의 사용’이다. 한국에서는 대화 중에 손윗사람 앞에서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인중 정도를 바라보는 것이 예의다. 굳이 손윗사람 아니더라도, 내향인이 많은 한국에서는 얼굴의 다른 곳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눈이 곧 그 사람이 집중하는 방향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해도 딱 좋을 것이다. 눈길을 활용한 다양한 몸짓이 풍부한 비언어적 소통의 도구이다. 눈알을 위로 굴리며 어깨를 으쓱하면 ‘낸들 어쩌겠냐’ 정도의 뜻이 된다.
대화할 때도 반드시 그 사람과 최대한 눈을 맞추고 있었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누구와 대화할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중간중간 시계를 보기도 하고 문자도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대화를 중시하는 미국에서는 대화 중에 그렇게 하면 무례가 된다. 당연히 전화받는 것도 안 된다. 그러니 책상이든 식탁이든 전화를 올려놓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 자신이 네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다.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경우는 앞에서 누가 말을 하거나 공연을 할 때다. 우리는 앞에서 누가 무얼하든 대화를 계속하거나 딴짓을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누가 앞에서 말을 하기 시작하거나 공연을 하면, 바로 하던 것을 멈추고 눈빛을 일제히 보내고 잠자코 듣는다. 그건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배워서 몸에 밴 습관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눈을 감거나 다른데를 보고 있거나 하지만, 그들은 ‘눈으로 음악을 듣는다.’
식당에서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처럼 ‘여기요~’ 소리치기보다는 조용히 눈을 들어 눈길을 직원들 쪽으로 돌리면, 마치 우리 눈길이 무슨 광선을 쏘는 거 마냥 바로 직원이 돌아보면서 다가온다.
우리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거나, 지하철 등에서 눈을 들고 사람 구경을 하기도 하지만, 미국인들은 무슨 말 눈가리개 해놓은 양, 누가 뭘 입었든 말든, 주위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죽하면 한 학기 내내 강의를 같이 들었지만 말을 걸게 되면 누군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식이다. 그러니 괜히 눈길을 두번, 세번 마주쳤다간 ‘너 왜 날 그렇게 쳐다보냐, 무슨 문제 있냐’하는 소리가 날아들게 마련이다.
미국 생활의 하나의 중요한 부분인 ‘마트 가서 장보기 혹은 구경’을 할 때, 복잡한 도심이 아닌 한은, 남의 카트 앞을 지나갈 때는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사람의 몸이 한 방향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카트가 있는데 앞을 내 카트를 밀며 휙 지나가면 무례하다는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예의가 바르고 범절이 중요한 동네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미국의 안동이라 부르는 애틀랜타가 그랬다. 내가 카트를 돌려 몸의 방향을 틀면서 그 앞에 통로를 막은 사람에게 '익스큐즈미excuse me'라고 말하면, 앞에 있던 사람이 ‘오! 내가 당신 길을 막고 있었나요? 미안해요’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이가 걷고 있는 방향에 바로 앞으로 가로질러 가면서는 익스큐즈미,라고 말하는 게 좋다.
이 모든 걸 다 무시하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디슨시decency, 즉, ‘품위와 친절’의 문제랄 수 있다. 메를로-퐁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계속해서 디슨트하게 행동하다 보면, 자연히 디슨트한 사람, 기품있는 사람이 된다. 모두가 품위있고 친절한 세상이야말로 여유있고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까.
가장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몸의 문화적 차이를 든다면, ‘눈 마주쳤을 때, 혹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미소 지으며) 인사하기’다. 한국인처럼 수줍게 아무것도 안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디슨트decent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미국인들은 지루하고 딱딱하며, 엄격 근엄 진지한 것을 못 견뎌한다. 그런 일상을 디슨시로 부드럽고 여유있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을 마주할 때 ‘하이’하며 살짝 웃는 것은 자칫 삭막할 수 있는 개인주의 사회를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미국에서 웃음지으면서 인사할 일이 훨씬 많다보니, 자연히 여유있게 되고, 디슨트하게 행동하게 되고, 긍정적이고 밝게 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보니 행복해진다’는 말이 딱이다. 그렇게 하도 습관적으로 미소지어서 입가 근육이 많이 발달한 채로 한국에서 똑같이 해봤더니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애틀랜타 있을 때, 한인교회로 ‘방어운전 교육’을 하러온 강사 말이, 신호대기할 때 등등, 다른 운전자랑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어주란다.(미국은 진한 선팅이 불법이다) 괜히 예의 그 뚱한 표정을 짓고 무시하면, 운전보복을 당하거나 심하면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미국 사람이 ‘나이스nice’한 것이 다 총 안 맞으려고 저렇게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사람도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밝게 인사하기 외에도 내가 좋다고 생각한 것은, ‘말로 잘, 자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저한 일을 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좋아요, 와! 대단해요 등등이다. 대화중에도 한번씩 ‘그러니까 이랬다는 거지? 그렇구나’ 하면서 ‘내가 지금 너 말을 잘 듣고 있다’고 표현하면 디슨트한 것이다. 이메일 답장도 문단 대 문단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언급하며 내 의견을 표하는 것은 디슨트한 일이다. 한인 모임을 하는데 누가 대신 나가서 피자를 포장해오거나 하면 그냥 ‘응 여기다 놔’가 아니라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도 디슨트한 일이다. 이런 디슨시는 ‘다른 사람이 한 일, 해준 일’에 대해 크게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인데 이렇게 하다보면 자연히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언어적 소통을 계속하면 결국 몸에 배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인정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나도 누가 무언가를 했을 때(특히 살림이나 아이가 한 것),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해줘서 고맙다’ ‘이거 오늘 한거야? 너무 잘했네’하며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렇게, 디슨트한 행동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나도 디슨시를 갖춘 사람으로 여물어 가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디슨트하게 행동한다면, 한국도 여유있고 웃음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사진-Pixabay https://pixabay.com/photos/rose-pink-flower-pink-rose-2378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