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사회와 말과 글의 힘
미국은 신용사회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단적으로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유명 대학 교수인데 자기 집 대출도 안되고 신용카드도 거절되었다는 말이다. 신용 기록이 짧아서 생기는 일들이다. 신용점수에는 차 대출(오토론)이라든지 다른 신용카드를 꾸준히 잘 써왔다는 것 등이 반영된다. 중요한 건, 남의 돈을 빌려다가 매달 꼬박꼬박 제대로 내고 있는가, 완납했는가, 그런 문제다. 그걸로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미국의 신용점수는 진짜로 믿을 만한 근거가 된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지켜야할 마땅한 도리가 있다고 믿는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신의 양심에 반해 거짓말을 해서도 안되고 남의 잘못을 마음대로 덮어주지 않는 것이다. 불의를 보면 아무리 부모자식간이라도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인에게 최악인 사람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가장 큰 욕이 ‘넌 인종차별주의자raicist야,’ 그 다음으로 ‘너는 거짓말쟁이야! You’re a lier!’이다. 정말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영화나 미드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 어떤지 한 번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거의 짐승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다. 부모가 자식한테 거짓말쟁이야라는 욕을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부모들은 아무거나 상황되는대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거나 둘러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키지 못할 때는 반드시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또한 연방 공무원에게 거짓말을 하면 심각한 범죄기록이 될 수 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글로 쓰여진 것은 합의된 규칙이다. 규칙을 지키려면 알아들을 수 있게 단순명료해야 하고, 알아듣기 쉽게 쓰여 있어야 한다. 미국은 다인종 사회다 보니, 아무것도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모든 경우를 명료한 원칙으로 통제해야 한다. 다문화권에서 오해받지 않게 쉽고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정책에 영어약자를 마구 쓰거나, 일부러 영어를 써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성문화된 사항은 가히 황금의 무게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공원에 가면 규칙이 알아보기 쉬운 큰 글씨로 딱 써 있다. 그러면 그거 빼고는 다 해도 되는 ‘자유’를 누려도 된다. 규칙은 단순해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국민들이 몇 번이나 확인해도 어려운 우회전 룰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 써놓은 것에 변경이 생겼는데 지적이 들어와야 고치는 나라가 아니라 빨리빨리 수정해서 모두가 지키게 한다.
쉽고 명료한 표현이 중요한 것은 다문화 뿐 아니라 교육수준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운전면허관리부서(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를 찾았다가 한 서류를 보게 되었다. 그 서류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 운전교육 책자는 미국 법에 의해 모든 사람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혹시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개선될 겁니다.’ 규칙을 만들고 모두가 알아듣도록 해서 지키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사회다. (영어식 글쓰기라는 것의 원칙도 똑같다. 단순명료하게 써야한다)
국가가 성문화해서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리라고 ‘믿을 수’있다. 누군가가 써준 글도 믿을 수 있다. 누가 거짓말을 감히 함부로 써서 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소송당하니까. 그래서 미국인들은 전화, 문자보다도 이메일 소통을 중시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우편물이 있다. 편지를 잘 챙겨보자.
다만 이것은 미국의 주류 백인 사회의 룰이기 때문에, 흑인이나 라틴, 아시아 문화에서는 글이 별 소용 없는 경우도 있다. 학교 글쓰기 센터에서, 내 글을 '언제까지 퇴고를 해준다'고 이메일을 보낸 어느 미국인 박사생은 자신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내 친구에게 팀프로젝트를 하면서 장황하게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언제까지 꼭 해오겠노라고 한 또다른 대학원생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느 인종인지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말하지 않겠다. 말과 글의 의미가 우리나라 비슷한가보다 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서 많이들 ‘나중에 밥 한 번 먹자’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그래? 언제? 이번 주말에? 몇시에 가능해?’ 바로 그 자리에서 약속을 잡으려 든다. 빈말이란 걸 모르는 것이다. 빈말을 베이그 코멘트vague comment라고 한다. 허황된 말이라는 것이다. 빈말, 거짓말 모두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되니, 미국 주류 사회와 소통할 때는 반드시 예는 예고 아니는 아니 그자체라고 여겨야 한다.
미국사람을 사귀려면 기본이 신뢰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 말에 책임지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져서 사람들과 잘 교류할 수 있다. (인종 문제는 또다른 문제다) 또 다른 방법은 이미 그 모임에 속한 사람을 아는 사람이 나를 소개해 주는 것이다.
성문문화의 최고봉은 추천서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내 지도교수가 누군가에게 나를 평하는 추천서를 보내야 한다면, 한국처럼, ‘자네가 대충 내용을 만들어 오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대충 좋은 소리만 써주면 되지? 그것도 안 된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판적 사고는 필수다. 모든 게 다 좋다는 상품평은 곧 거짓말이다. 그것도 빈말에 속한다. 그 추천서가 진실하려면 이 학생의 단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수가 서명을 하고 편지봉투를 봉하면 나는 영원히 그 내용을 알 수도, 감히 물어봐서도 안된다.
이러하니 미국 사람이 무슨 서류를 서명하라고 들고오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꼼꼼히 읽는다고 ‘에이 뭐 그렇게까지 해요~ 다 좋은 내용이야~’하며 재촉하지 않는다. 표현이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알려달라고 해야 한다. 이런 기풍을 모르고서 무슨 미국 관료랑 협상을 하니, 양해각서(MOU)를 맺니, 미국에서 장사를 하니, 사업을 하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서 사는 게 왜 머리 아픈지 알 수 있다. 사람의 말이고 글이고 믿을 수가 없다. 이 사람 말이 거짓이면 어쩌지? 사기면 어쩌지? 정책 만드는 사람들은 정책의 선용보다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막을까’하며 온갖 확인절차를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놔서 관공서를 발이 닳게 오가게 한다.
'한국이 OECD국가 중 사기죄 1위'라는 유언비어가 있다. 사실이 아니다. 더팩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UNODC'(유엔마약범죄사무소, 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통계에,1위는 스웨덴이다. 인구 10만명당 사기범죄가 2762건이다. 더팩트가 대검찰청 통계원표를 활용해 인구 10만명 당으로 환산하니 한국은 682건이다. 참고로 독일이 964건으로 한국보다 많고, 일본은 24건에 불과하다(!). 이런 인구수 당 미국 통계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보다 높은지 낮은지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이 세계 국가들 중 상위권에 해당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신용사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일상적인 예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여행하면서 까먹고 해외로밍 신청을 안해서 요금이 이삼백 달러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다른 한인이 일러주길,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하면 요금을 탕감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수가 있나? 하며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자, 그 직원은 내 말을 ‘믿고’ 초과요금을 바로 전액 탕감해줬다.
‘프라이스매치price match’라는 제도가 있다. 자유시장경제 무한경쟁의 사회니 가능한 제도인데, 자신들이 ‘업계 최저가 보장!’이라고 광고했는데 그보다 더 싸게 어디서 팔더라는 정보를 내밀면, 그 자리에서 매니저가 그 말을 믿고, 바로 차액을 내주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해서 내가 산 약의 돈을 거슬러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와서 문화충격이었던 것이 있다. 우리 없는 새에 배달플랫폼서비스가 시작이 됐는데 결정적 정보인 '후기'들이 심하게 오염되어 있던 것이다. '후기 이벤트'가 아니라 '뇌물 이벤트'가 아닌가. 미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뇌물bribe'이다. 미국 아마존의 후기들을 보면 1개월 사용소감, 3개월, 1년 소감, 장단점 등을 소상히, 논리적으로 적은 것들이 많아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 웹마켓 후기는 믿을 게 못된다. 돈받고 '거짓말'써주기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래선 절대 선진국이 안된다.
미국의 신용 사회를 살면서, 거짓말해서 이런 저런 혜택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니는 한인들도 있다.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 사람에게는 정말 그 사람의 '평판reputation과 명예honor'가 중요하다. 체면이나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중요하다. 하느님과 자신과 가족에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정직’과 ‘신용’이라는 무형의 가치가 바위처럼 무겁게 흔들림없이 실재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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