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증 이야기1
이런 이야기를 쓰자니 주저가 된다. 하지만 써서 남겨야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쓴다. 하기는 요즘은 우울증이 하도 흔해져서 ‘영혼의 감기’같은 말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보통 사람들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안됐다, 그러려니, 하는 듯 하다.
나는 우울증을 미국에서 처음 겪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 경험으로 알기는 우울증에 걸리는 경로로는 ‘탈진’이 있다. 탈진되고 나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 꼭 필요한 일을 대책없이 계속 미룬다거나,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걷잡을 수 없이 난다든가, 전에는 위로를 얻고 감동을 얻고 즐거움을 누리던 그 어떤 일을 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거나,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죽고싶은 생각이 계속 난다면 그건 이미 심각한 우울증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살 생각은 해보지도 않는 그런 복된 인생을 산다하니, 한 두번이라도 죽을 생각을 해봤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일이다.
자세한 건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무섭다, 낯설다, 보험에 기록이 남으면 불이익이 된다, 등등 여러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의사를 만나 자세한 상담을 하고 약을 타야 한다. 이걸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증세가 더 심각해지고, 그러면 치료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주변에 지인이나 가족이 우겨서라도 반드시 빨리 정신과에 가봐야 한다. 보통 후기가 좋은 정신과는 진료예약에만 두 달, 석 달씩 걸리기도 하니 일단 전화해서 진료부터 빨리 잡을 일이다. 자꾸 ‘빨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약도 더 센 약을 받고 치료기간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나의 팁이지만, 기록에 남기 전에 미리 들어두어야할 건강 관련 보험은 들어두는 게 좋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미국 유학까지 이르는 몇 년의 시간을 너무 고되게 보냈다. 한국에서 목회학 석사를 할 때는 이사장 비리를 규탄하는 학내투쟁에 가담해서 진을 뺐고(그땐 젊었다..), 그 뒤로는 졸업 논문 쓴다면서 또 기를 썼다. 하지만 본게임이 남아있었으니.. 나는 유학 준비와 결혼 준비를 동시에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토플시험 공부는 단 한 번 수업을 빠져본적도 없이 매일 새벽반을 다니며 독하게 스터디팀장도 했다. 결혼준비과정이 남들과 달리 너무나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진을 빼고 나니, 완전한 탈진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
박사과정 입시를 위한 준비 단계였던 신학 학술 석사과정은 어쩌다 좋은 학교를 가는 바람에 그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한참 굴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학교에서 시작한 박사과정이었다.
나는 입학 첫 날부터 부전공 지도교수에게 ‘첫인상부터 안 좋다’는 욕을 먹어야했다.(그 사람도 목사다) 그러니 그 뒤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까다롭고 제멋대로 하기로 악명 높은 사람인 줄 몰랐으면 부전공 지도교수로 선택하지 않았을텐데, 나는 국내 전통있는 신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이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같은 교단 출신끼리만 정보를 공유했다. 자세히 캐물을라치면 의뭉스럽게 뻔히 자빠질 수 있는 길로 안내하는 성의없는 대답을 들어야했다.
그렇게 학교 생활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트럼프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하루하루 저주에 가까운 이민자 정책 발표되고, 거기에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증)까지 겹쳤다. 나는 열댓평 가족기숙사에 신생아와 함께 갇혀 공부할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밖에도 나갈 수 없이(미국은 카페까지 모조리 문 닫았다) 박사과정 시험을 오로지 혼자서 준비해야 했다. 그러니 왜 우울증이 안 걸리겠는가.
유학생들이여. 설령 내가 말한 증상들이 없더라도, 당신은 이미 유학준비에만도 지쳐있다. 건강검진 받는다 생각하고 꼭 학교내 정신건강 센터에 한 번 가보라. 상태가 좋을 때, 발길을 한 번 터놔야 나중에 위기가 찾아올 때 바로 찾아갈 수 있다. 그것도 다 등록금에 포함된 것이니 꼭 가보길 추천한다. 꼭 유학생 아니어도 평소에 괜찮을때 한 번 꼭 가보라. 그러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된다. 정신과는 정신 멀쩡할 때 가봐야 한다.
쓰는 지금도 마음이 너무 맵고 쓰라리다. 다시 생각하기가 싫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혼자 고립되어서 안타깝게 결국 실패할 일에 애를 쓴 게 아닌가 후회가 된다. 하지만, 그런 이에게 ‘그러게 그때 이래저래보지 그랬어~’하는 말은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낮아질대로 낮아진 자존감에, 나는 목사도 아닌데 주변에 온통 목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짓 때문에 신앙에 시험까지 닥쳐왔다. (결국 나는 지금도 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게 강진으로 무너져 흩어져버리는 그런 위기였던 것 같다.
고전하는 와중에 난생처음으로 한인교회 영어부 담당 전도사가 되어버렸다. 보통은 이민 1.5세나 하는 일을 내가 맡고 보니 영어실력도 신경써야 했고, 차로 왕복 두시간이 걸리는 오가는 길도 그렇게 내 진을 뺐다.
시카고의 길고 긴 겨울에, 정체성이 미국인인 학생들, 직장인들과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를 하고나면, 한주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집에 가는 길은 너무나 쓰라리게 외로운 생각들이 자꾸만 나는 슬픈 길이 되었다. 그때 우연히 젊은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서 하는 ‘뇌부자들’이라는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시카고의 눈이 펄펄 내리는 밤에 다자이 오사무의 허무주의 소설, ‘인간실격’ 리뷰를 들으며 마음에 위로를 얻던 시간을 잊지 못한다. 이 자리를 빌어 그 의사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보통 유학 박사과정을 마치는데 필요한 3요소로 정신력, 체력, 재력을 든다. 나는 빨강 신호등이 반짝이는 걸 인식도 못하고 시지프스의 산에서 떨어지는 돌을 굴려올리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빵 터져버렸다. 죽을 생각이 구체적인 방법과 도구 찾기로 이어지자 나는 어떻게든 살 수를 찾아야했다. 그때는 아내도 이 병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때였다. 나는 힘들게 힘들게 집 근처에 후기가 최악은 아닌, 한인 정신과 의사와 진료예약을 했다. 진료일에 나는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머리로 간신히 사고 안내고 운전해서 정신과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고 약을 지어왔다.
그런데 희한한 게, 약을 먹고 나니 바로 불면증도 사라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가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수년을 질질 끌며 그 고생을 했는지 후회가 된다. 워낙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많고 정보는 적어서 이 병이 뇌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잘 통제하기만 하면 되는 병이란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 나는 이미 2주간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못자고 있었고, 하필 그때 스트레스로 인해서 혈변을 보고 있을 때였다. 최악이었다.
의사와는 한국말로 대화했다. 초진은 보통 길다. 선생님은 우울증 척도 간단 검사를 했고 수치가 높다고 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주욱 듣고서는 ‘Major Depression Disorder’ 즉,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했다. 그제서야 내가 왜 지난 몇 년간 모든 일을 미루기만 하고 집중도 못하고 새로운 일은 착수도 할 에너지가 없었는지 환히 밝혀지는 느낌이었다.
-2부에서 계속-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