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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반스토니언 Aug 09. 2024

Per aspera, ad astra

나의 우울증 이야기2

미국의 엄청난 의료비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을 것이다. 시카고 시청 소방부의 앰뷸런스 이용료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2024년 기준, 911 눌러서 앰뷸런스가 집에 왔다하면 무조건 3천 달러(1달러=1375원으로 계산시 412만원)다. 거기에 1 마일(1.6킬로)당 19달러씩 추가로 붙는다. 한번은 아내가 감기로 아파서 내과에 가니 그 한 번 방문에 의료보험이 없으면 80달러를 내야했다. 감기인데요~ 한 번에 11만원. 약값은 별도에요~ 내 기억으로는 정신과 한 번 방문에 120달러~180달러씩 냈던 것 같다. 의사 한 번 보는데 16만원~25만원씩이다. 그나마 석 달에 한 번 가서 다행이었달까. 유학생 처지에 절로 카드빚이 쌓이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정신과는 문턱에 이르기가 여러가지 이유로 어려운데, 유학생 처지니 어땠겠는가. 미루고 미루다가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찾아갔다. 2주째 잠을 못 자고 하루 하루 동터오는 새벽만 멍하니 바라보다 내린 결정이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혈변까지 보는 상황이었다. 몸까지 병이 나버리니 우울증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그것도 또 항문외과 가면 이번에는 돈이 얼마나 나올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갔다. 자리에 모로 앉지도 못해서 발받침 의자에 엎드려서 바닥에 책을 놓고 읽었다. 


첫 진료 때 나는 엉엉 울었다. 어디에도 말할 곳이 없어 혼자 끙끙대던 부전공 교수와의 갈등이 주원인이었다. 의사가 준 약을 먹으니 신기하게 바로 잠이 왔다. 하루하루 푹 잘 수 있었다. 진작에 갈 걸. 


그러나 사정이 당장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뭘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박사과정 종합시험 준비는 그야말로 맨땅에 머리박기식이었고 학교는 코로나로 폐쇄되었다. 그렇게 고군분투 하다가 결국은 시험에 최종 낙방했다. 내 우울과 불안은 극에 이르렀다. 위기였다. 의사는 안정제의 분량을 확 올렸다. 얼마나 올렸는지 먹고 나면 오전이고 저녁이고 잠이 쏟아졌다. 나는 워낙 예민한 편인데, 도저히 멈추지 않는 예민의 날선 촉과 불안을 강제로 무디게 하는 약이었던 듯 하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주변일에 대충 무감해질 수는 있었다. 


그러다가 집에 너무 가보고 싶어서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갔다. 먹던 약이 떨어지자 괜찮은 의사를 추천받아 거기엘 갔다. 그 의사는 내가 먹는 약을 보더니 흠칫 놀라면서, 한국에서는 이 정도면 거의 최대치로 약을 쓴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죽을 수는 없었다. 미국의 한인 의사는 상담도 해야한다고, 정신과 치료는 반드시 약과 상담이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허나 미국땅에서 그 비싸다는 상담이라니. 한 시간에 최소 백 달러 이상은 내야할 터였다. 그래서 머리를 쓴 게 한국에 방문했을때 거기서 상담을 받다가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영상으로라도 상담받아야겠다 싶었다. 


이미 정신과와 상담을 다니는 지인에게서 상담사를 추천받았다. 그 상담사를 방문해서 사정을 통사정을 했다. 다행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담사 방문도 쉬운 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든 시기에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유일한 동아줄이 되었다. 다행히 상담료도 미국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나는 상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차피 나랑 절친한 목사 친구에게 그냥 진솔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었다. 상담사는 처음에는 자신이 배운 무슨 학설을 기반으로 내게 숙제도 내주고 했었다. 나중에는 그런 것 없이 거의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쭉 이어졌다. 


미국에 있는 동안은 영상상담으로 했다. 코로나 시기라 다행히 이런 식의 진료가 많아진 듯 했다. 상담사가 하는 일은 내가 서술하고 있는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뒤집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거나, 인과관계에서 다른 원인(원가정에서의 문제 등)을 찾아 탐색하게 해준다거나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주중에는 나의 노력이 필요했다. 상담사가 말해 준 것을 화두처럼 붙잡고 일상 속에서의 내 생각과 반응을 기록해두는 것이었다. 


요즘 많이 말하는 MBTI에서 나는 ISTJ(한국인 중에 가장 많다고 하는 유형. 잠잠히 자기할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인데 이야기를 해볼 수록 나는 그냥 우리 집안에서 그렇게 길러졌던 것이고, 나는 사실 ISFJ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좀 더 감성이 발달해 있는 모양새다. 관점을 달리해서 보니, 나는 몰랐지만, 나의 감정적 반응이 통하지 않는 사고 중심의 가족들 사이에서 내가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굴 탓할 게 없다. 그냥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다. 상담은 이렇게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나의 힘든 시간을 확대해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나중에 한국에 귀국해서는 이제는 그 한인 의사와는 그만 이별이고, 상담사도 바꾸기로 했다. 집 근처에 좋은 정신과가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리가 너무 멀면, 마치 헬스장처럼, 자주 다니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후기가 좋은 곳은 석 달 뒤에나 예약 가능하대서, 나는 당장 약이 떨어져 급한지라, 초진 환자는 하루에 1명씩 방문예약이 가능한 곳을 찾아서 거기에서 선생님에게 다시 상황을 털어놓고 약을 타기 시작했다. 미국 의사는 사실 내가 꼭 한인 의사를 원해서 찾은 거지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의사를 고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선생님은 그전 보다는 훨씬 나았다. 의사는 주로 약 처방을 중심으로 내 이야기를 간략하게 듣는다. 나는 고용량 약의 부작용으로 살이 왕창 쪄 있었다. 내 안에 계속 에너지가 없다는 신호가 있으니, 아무래도 고칼로리 음식을 본능적으로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장기복용한 경우에 해당됐다. 의사 선생님과 약 용량을 줄여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새 상담사도 찾았다. 전에 상담사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건 내가 목회학 석사를 하면서, 기독교상담학의 기초 같은 과목을 들어봤기 때문에 드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병원과 협력관계인 상담센터에 새로 연락을 해서 나는 비기독교 상담사를 찾고 있으며, 나는 나를 밀어붙이는 상담사보다는, 나를 주로 위로해주는 상담사를 찾는다고 했다. 새로 만난 상담사와의 상담은 약 1년 간 지속됐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일단 상담을 종료하기로 했다. 


8년 만의 귀국이었다. 삼십대 초반에 유학을 떠나서 이제는 마흔을 넘어 다시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에서 살며 이제는 대략 어디가야 무슨 물건을 살 수 있는지, 관공서는 어떤 식인지 알 때쯤에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했다. 나가서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전자책으로라도 우울증에 관한 책을 계속 읽어왔다. 그런 노력도 중요했다. 단편적인 지식을 유투브를 통해 얻기보다 책 같이 양질의 깊은 정보를 접하는 게 나았다. 환자의 책을 읽으면서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었고 전문가가 쓴 책은 내 의사와 상담사가 놓치는 부분을 채워주었다. 


나는 뚱뚱해진 내가 싫어서(모든 약이 그렇진 않다. 나는 극단적인 경우였다) 체중감량을 하려했더니 선생님이 말렸다. 지금 상태에서 그런 부담까지 지면 치료가 늦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꾸준한 운동, 볕보기, 사람 만나기가 숙제였기 때문에 큰 부담 없는 상태에서 생활습관 고치는 식으로만 해도 살은 빠졌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내가 안정을 찾아갈 수록 자꾸만 그 부전공 교수가 나와 나랑 한바탕씩해서 정신이 사나웠다. 선생님에게 나쁜 일이 빨리 잊혀져서 생각이 안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건 불가능 하단다. 아마 계속 생각날 거라고, 그런 사건이 쉽게 잊혀지진 않는다고 해서 기대는 접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가면서 보니, 내가 납득하지 못했던 부분도 납득하게 되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도 되고, 내가 인지 못했던 실수도 떠오르면서, 지금은 계속해서 약 용량을 천천히 줄여가는 단계에 있다. 나는 그간 내내 내가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사실은 매우 강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내 안에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삶에 대한 소망이 있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혐오를 버리고 자기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늘 내 자신에게 벌주는 가학적인 마음이었다. 유학 초기에는 정신차리라고 내가 나를 벌했다. 얼굴이 벌개질때까지 내 뺨을 마구 때렸다. ‘나 같은 건 없어져야돼’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울증 관련 책과 다양한 소설 등을 읽어가면서 내가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샤워 후 거울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내가 나라서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극한 자기혐오를 멈추자 자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자살 생각도 버리게 되었다. 나는 사실 삶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내 삶에 왜 이런 헛수고 같은 고통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돌아보면 그 고통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자신을 찾았다. 내 자신을 구해냈다. 그것만으로도 지난 8년의 시간은 무익하지 않다. 내 유학을 실패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죽을 내 자신이 살아돌아온 것으로, 앞으로 내 삶이 너무 기대된다는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과거보다는 앞날을 바라보기로 했다. 



Per aspera, ad astra

고난을 통해 별빛으로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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