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부의 보석
미국 중서부Midwest의 보석같은 도시, 시카고. 내가 대학생일 때, 시카고를 처음 여행했다. 혼자한 여행이었는데, 그때 내게 시카고는 건축이 멋진 도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카고 미술관이 있는 도시, 시카고 피자를 먹었던 도시로 기억되었다. 그 다음 방문은 유학생으로 와서 5년 간 이어졌다.
시카고는 참 멋진 도시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은 미국에서 가장 가볼만한 도시로 뉴욕과 LA가 아니라,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를 꼽았다. 나도 그 조사에 십분 공감한다. 뉴욕에도 멋진 볼거리가 많지만, 나는 뉴욕이 너무 시끄럽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LA는 거기서 십년 넘게 산 한인도 볼 거 없으니 굳이 오지 말라는 도시였고.
미국 중서부는 동서부 해안가 도시들과 달리 이민자가 많지 않아 ‘찐 미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미국 뉴스 앵커들도 발음훈련을 받을 때 중서부 발음을 중심으로 훈련받는다고 한다. 시골지역에 가면 너른 옥수수밭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미국의 시골문화가 잘 보존되고 있고, 도시지역에 가면 ‘미국적인 멋과 맛’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에게 시카고는 총기 살인이 숱하게 일어나는 범죄의 도시, 재즈의 도시, 뮤지컬 시카고의 도시 정도로 알려져 있는 듯 하다. 그것들은 과거의 이야기거나 시카고 일부 지역의 이야기이다.
브롱스에서 보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멋있다고 하지만, 유명한 ‘건축물 보트투어’를 타고 시카고 강을 지나 드넓은 미시간 호수로 나가 석양을 바라보면, 다양한 모습의 고층빌딩이 한데 모여 어우러진, 섬세하게 공들여 만든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저녁빛을 반사하는 빌딩들의 파아란 색은 모두 미시간 호수 물빛을 반영해 만든 색이라고 한다. 도시의 왕관같이, 버킹엄분수가 가운데에서 높은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것을 보면 더할 나위없이 멋진 도시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여행책자를 보면 ‘시어스(현 윌리스) 타워’와 ‘존 행콕 센터’가 시카고 스카이라인의 핵심으로 소개되지만, 그런 미끈한 현대식 건물 외에, 시카고의 진가는 장엄한 오래된 양식의 건축물들에 있다. 시카고 트리뷴 타워가 고층이지만 꼭대기는 화려한 고딕양식으로 지어졌고, 박물관들이 모여있는 ‘뮤지엄 캠퍼스’의 시카고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도 모두 석조의 고전양식으로 지어졌다. 도심 곳곳에 ‘리버워크’(청계천 같은 곳)라든지, 다리 등은 모두 고전적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는 ‘도시 미화 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시기에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면 사람들이 그것에 영감을 받으리라는 목적으로 도시가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성공한 것 같다. 나 같은 유학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시카고 미술관은 많은 수집가의 기부로 명작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조르주 쇠라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과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비오는 날의 파리 거리,’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테라스의 두 자매,’ 클로드 모네의 ‘수련,’ 반고흐의 ‘자화상’과 ‘침실’ 등 많은 인상파 작품과 르네 마그리트, 파블로 피카소,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다수, 에드워드 호퍼 등의 작품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미술관 하나의 가치는 삼성미술관 리움도 가뿐히 제칠 뿐 아니라 어지간한 유럽대륙 미술관 못지 않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시카고 미술관에 학생 멤버십에 가입해서, 공부가 힘들때마다 가서 많은 위로를 받고 오곤했다.
도심에는 시카고 강이 흐르는데, 강을 건너는 다리들은 모두 도개교로 배가 지나가면 열리게 되어 있다. 그것도 뭔가 멋지지 않은가. 움직이는 다리라니. 코로나 혼란기에는 시위를 통제하느라 다리를 전부 올린 적도 있다. 그런 다리를 지나가면 ‘시카고 시빅 오페라’극장이 있다.
처음으로 오페라에 갈때, 아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사교계에 등단하는 심정으로 아내랑 같이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오랜만에 반짝이는 것들을 하고, 나는 나비넥타이에 버버리 머플러를 둘렀다. 유학생으로 팍팍한 살림에 시달렸지만, 학생 티켓의 은덕으로 하루 저녁이 신데렐라가 누렸던 저녁처럼 성대해졌다. 동네 이웃인 아저씨도 멋지다고 해줬다. 우리는 거기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모짜르트의 ‘세비야의 이발사’를 봤다.
저녁으로는 비록 프렌치 다이닝은 아니지만, 시내 기차역 지하에 있는 프렌치 마켓에서 맛난 것들을 먹은 적도 있고 멋지게 차려입고 햄버거를 먹은 적도 있고, 크리스마크 마켓에서 파는 뜨끈한 굴라쉬 같은 것을 먹은 적도 있다. ‘헤이, 넥타이 멋지네요’하고 일하던 청년이 지나간다.
학생 티켓이라 비록 자리는 무대가 조그맣게 보이는 높은데 끝자리였지만, 그럴 줄 알고 아마존에서 미리 사간 오페라 글래스를 착 펼쳐들고 열심히 오페라 구경을 했다. 무대 위에 자막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와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휴식시간이 되자 모두들 커다란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로비로 나와 20분간의 긴 휴식을 즐겼다. 할 수 있는 작은 사치지만, 나는 미리 주문해놓은 샴페인을 아내와 한잔씩 손에 들고 빨간 카펫이 깔리고 주물 난간이 황금으로 빛나는 계단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사진찍는 내 뒤로 정식으로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대학생 커플이 지나갔고, 거기서 찍은 사진은 ‘위대한 개츠비’의 파티 장면처럼 나왔다. 심지어 고전극에서나 볼 법한 높은 실크 탑햇에 하얀 목도리를 걸치고 ‘블랙앤화이트’ 테일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든 노신사도 볼 수 있었다. 시빅 오페라단은 매년 첫 오페라 시즌이 돌아오면 유명한 ‘오페라 볼Opera Ball’파티를 열어 기부자들을 환대하고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사교의 장을 만들어 준다. 그 노신사 부부는 아마 그런 기부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뭐, 꼭 기부자 아니더라도 누구든 하루 저녁 잘 차려입고 얼마든지 영화의 주인공처럼 해볼 수 있었다. 신데렐라의 자정 종이 칠때까지는 환상 속에 살 수 있다.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반드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올리는데, 이번에는 대학 후배네 부부랑도 같이 갔다. 나는 겨울마다 여러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곤 했는데, 이 ‘시카고 발레단’의 버전은 매우 흥미로웠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흑인 무용수도 있었다. 여러나라의 춤들이 선을 보이는데, 원작에는 없던 새로운 장을 끼워넣었다. 카우보이 발레리노가 나와서 ‘히하!’를 외치며 빙빙 돌며 카우보이 묘기를 선보였다. 안무가 훌륭해서 위화감이 없이 작품과 잘 녹아들었다. 춤이 끝나자 다들 신나게 박수를 쳤다. 거기에서 미국인들의 자기 문화 사랑과 자부심을 볼 수 있었다. 명작을 단지 똑같이 흉내내는 게 아니라 오늘의 모습을 끊임없이 반영함으로서 문화를 사랑하고 발전케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도시에 살고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만든다. 거기에 도시의 심장이 활발하게 뛰고 있다.
여름이 되면 세계적 오케스트라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야외로 나간다.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인 근교 공원에서 ‘래비니아 페스티벌’을 연다. 나는 대학시절 여행 중에 기차타고 처음 가봤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지,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여름날의 주중 저녁이었다. 한국처럼 덥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미시간 호수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모두들 다양한 캠핑 의자 세트를 들고나와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게 또래들과 어울려 놀았다. 캠핑 테이블에 아이보리색 레이스 식탁보를 깔고 유리병에는 새빨간 장미꽃을 꽂고 초도 켜놓고 와인을 마시는 집도 있었다. 정말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이번이 두번째라서, 아내에게 ‘곧 신기한 기적이 일어날테니 잘 봐’했다. 오케스트라는 파빌리온석이라고 해서 지대가 낮은 곳에 지붕이 덮여있는 반야외인 건축물 안에서 연주해서, 연주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파빌리온석 티켓은 비쌌고 우린 ‘잔디밭 자리’ 티켓을 6달러씩에 사서 앉았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 잔디밭 자리였고 정작 공연은 공원내 스피커로만 듣는 형식이었다. '에이 이게 뭐야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 라디오 듣는 거랑 뭐가 달라,' 할 법도 했다.
다들 시끄럽게 놀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가 조용히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공원 전체가 조용해졌다. 마법같은 일이었다. 웃고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던 애들도 모두 자기 부모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유아고 초등학생이고 예외는 없었다. 차분히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선율이 연주되는데, 소리라곤 부는 바람에 나뭇잎 비비는 소리 뿐이었다. 모두가 진지하게, 눈을 감거나 하늘을 보며 정말로 음악을 음미하고 있었다. 넓은 잔디광장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가 ‘침묵’을 피아노 연주자와 함께 협연하고 있었다.
그런 시카고였다.
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운 도시. 멋진 고딕 빌딩들과 화강암으로 꾸며진 도시 구석구석. 하지만 가장 멋진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다. 문화를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시카고 사람들과 보석같은 그 도시가 그리울 때가 있다.
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