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 가서 갱신한 운전면허증을 받아 왔다. 영문이랑 IC모바일 면허증도 같이 신청했다. 기존 면허증 뒷면에 영어로 표기가 되어 있어 우리나라와 관련 협약을 맺은 나라에서는 운전면허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IC모바일 면허증은 스마트폰 앱을 내려받고 면허증의 IC부분을 폰과 접촉해서 모바일 면허증을 발급받는 시스템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내 지갑에서 면허증을 빼놓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이 운전면허증. 미국에서는 모두가 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신분증명 수단으로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영주권이나 있어야 ‘단기’(Limited Term)이라는 말이 빠진 영구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단기체류자는 비자 인터뷰에서 받은 햇수만큼만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그 귀한 신분증을 받으려면 마음을 단디 먹어야 한다. 미국에서 일 못하기로 악명 높은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즉, 차량관리국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합법 체류하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증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무원들 태도가 엄격하고 고압적인 편이다. 입국심사를 다시 받는 거마냥 긴장이 되곤 했다.
그것도 나는 석사때는 조지아주 면허증을, 박사때는 일리노이주 면허증을 따야했다. 그런데 조지아주는 현대기아차 공장이 있는 주이면서 한인타운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한국과 협약을 맺고 있었다. 영사관에서 한국 운전 면허증에 대한 서류를 떼서 내고 필기시험만 다시 보면, 조지아주 면허로 교환해주게 되어 있었다. 대단한 특혜다. 게다가 필기시험도 한글로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은 조지아주는 운전면허도 쉽게 내주었지만, 일리노이주는 달랐다. 거기도 한인 사회가 크긴 하지만 영사관에서 계속해서 운전면허 협약을 종용해도, 절대 맺어주지 않는 게 일리노이주였다. 심지어 타주 면허가 있더라도 일리노이에 오면 다시 필기, 실기 시험을 봐야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받으려면, ‘유효한 실거주 주소’가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최소한 두 통의 전기, 가스, 인터넷, 병원기록 등 공공기관에서 받은 레터를 제출해야만 한다.
악명높은 DMV를 다녀오는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질 않다. 길고 긴 대기줄을 피해 일부러 한가한 동네를 가든지, 아니면 지인을 통해서 거기 일처리 잘하더라, 언질 들은 데를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무사고로 수년을 운전하고 조지아주에서도 성실하게 운전해서 보험기록도 깨끗해서 자신만만했다.
추운 날 아침에 밖에 한데서 줄을 한참 섰다가 순서대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가히 전세계 인종을 모아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했다. 일리노이주는 조지아주보다는 일처리가 좀더 합리적이었다. 입구에서 서류만 확인하는 직원이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걸러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미국 비자심사, 입국심사 등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잔소리다. 직원이 요구하지 않은 서류 뭉치를 내놓지 말것. 나는 언제든 직원이 말하는 서류를 뽑아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섰다. 필요서류를 다 냈는데도 직원은 바로 사진을 찍으라 보내지 않았다. 직원은 백인 할머니였다. 기록을 살피더니 눈을 홉뜨고 ‘너 혹시 어디에서 언제 사고내지 않았냐,’ ‘너 어디에서 벌금물지 않았냐,’ 동명이인인 사람이 저질렀을 일을 물어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한국에서도, 조지아에서도 무사고로 운전했다고 하자 갑자기 짜증을 벌컥 내면서, ‘니가 어디에서 뭘 했든 상관없다. 여기는 복잡한 시카고고, 운전하기 어려운 동네다’라는 것이다.
속으로 ‘당신이 어디 한 번 퇴근길에 강남대로를 운전해보라지. 뭐? 시카고가 운전이 힘들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내가 마음에 퍽이나 안 든 모양이지만, 내가 일관되게 부인하니까, 마지못해서 사진찍으라고 내보냈다.
반면에 조지아주는 사람은 시카고처럼 많지 않았지만 일처리가 엉망이었다. 유학생 신분을 증명하는 I-20라는 중요한 서류가 있다. 그런데 서류를 돌려줄 때 엉망진창으로 쌓아 돌려줘서 안 준지 몰랐다. 나중에 차 타고서야 그 서류를 안 받았다는 걸 알았다. 가슴이 철렁했다.(그때는 그 서류란 게 그저 국제학생 담당자가 쉽게 출력해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고 찾으러 갔더니, 누가봐도 신입인 청년이 내 서류를 스테플러가 박힌 그대로 스캐너에 밀어넣기 직전. 잔뜩 구겨지고 조금 찢어져 있었다. 매니저가 와서 보더니 미안하다면서 임시 종이 면허증을 내주는데 유효기간을 2년이나 더 길게 해서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석사 마치고 체류 연장하면서 또 가야하는 DMV를 안갈 수 있었다.
나중에 시카고를 운전하다보니, 왜 그렇게 면허 심사가 엄격한지 알 수 있었다. 겨울이면 눈이 엄청스레 내리는 게 시카고 지역이었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차들이 모두 성실하게 서행 운전을 지켜서 사고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아주에 1~2인치 눈이 오자, 제설기란 게 없는 동네인데다, 누구도 눈길 운전을 안해봐서 사고가 엄청 났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어떤 면허증을 따는지 몰랐다. 그게 본토인으로 사는 특권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지만, 사실은 알고보면 전혀 당연한 게 아닌 것이 운전면허증이다. 오늘도, 그런 당연한 것들이 가득 들은 지갑을 들고 다니겠지만,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자. 내 나라 내 땅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