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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반스토니언 Dec 12. 2024

시카고의 겨울 추억

시카고의 겨울은 무척 춥고 길다. 위도가 만주쯤 된다. 이미 10월, 11월이면 해도 일찍 지기 시작해서, 동지에 가까워지면 오후 세네시면 벌써 어두워진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맑은 날이 거의 없다. Seasonal Depression이라고, 계절성 우울증 생기기 딱 좋은 날씨다. 겨우내 쨍한 햇볕을 못 본다니, 생각만 해도 답답하지 않은가. 을씨년스럽고. 괜히 몸 여기저기가 쑤시는 느낌이다. 


집이 추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일정시대때 지어진 집’이라고 말하곤 하는 우리 학생 가족 기숙사는 정말로 명패에 1935년에 ‘취득’한 학교 재산이라고 써있다. 벽돌로 든든 단단하게 지어진 3층짜리 아파트였다. 난방은 저 옛날 학교 교실에 있던, 물 흐르면 딱딱딱 소리가 나는 무쇠 라지에타로 해서, 집이 무척 더웠다. 난방을 반만 열면 밸브가 상한다고 해서 무조건 풀로 켜놓든지 아예 꺼두든지 해야했다. 그래서 불을 자주 쓰는 주방쪽은 꺼놓는다든지 나름 열기를 덜하게 하려고 해봤다. 하지만 난방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집은 그야말로 ‘불가마’를 방불케했다. 너무 더워서 여름 반바지 반팔 차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잘 때 너무 더워서 침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자야 숨이 안 막힐 정도였다.


난방을 중앙공조기로 하는 아파트도 살아봤는데, 그건 너무 건조했다. 건조한 바람이 계속 나오는데 너무 건조하다 못해 늘 코피를 달고 살았다. 밤에 자고 나서 아침에 코를 풀면 코피가 터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난방은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여~


북극 원주민들은 눈을 칭하는 말이 수십 가지라고 했다. 눈 종류를 구별하는 모양이다. 그와 비슷하게, 시카고의 눈은 습하고 무거웠다. 시카고의 겨울은 습해서 정말 온 몸에 추위가 구석구석 스멀스멀 잠겨드는 느낌이다. 한국의 눈은 건조해서 내릴 때도 나풀나풀 가볍게 내린다. 하지만 시카고 눈은 보기에도 무겁게 펄펄 나린다.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책이 있다. 시베리아 벌판 수용소에서 지내는 수형인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거기에 보면, ‘부란’이라는 엄청난 눈보라에 대한 설명이 있다. 나는 시카고의 눈보라를 처음 보자마자 그 속절없이 막막한,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부란’을 떠올리곤 했다. 이건 부란이다, 부란이야.


그럴 일은 없지만, 시카고에 집을 산다면, 반드시 차고 있는 집을 추천하겠다. 왜냐하면 겨울에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이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출근할 때 그 눈을 치우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다. 우리 아파트는 지붕있는 주차장은 없고 길가에다 차를 대야했다. 밤새 눈이 한바탕 내리고 나면 팔뚝 하나는 쑥 들어가게 두텁고 무거운 눈을 떠내서 치워야 했다. 습한 눈이라 눈이 더욱 무거웠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잔머리 굴리기에 능한 나는, 아마존에서 차 앞유리 가림막과 사이드 미러 주머니를 샀다. 그러고 눈이 올작시면 미리 나가서 가림막과 주머니를 채우고 왔다. 어느날 아침, 또 밤새 무지막지한 눈이 내려서 다들 나와서 차를 눈에서 ‘발굴’하려고 기들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도도히 걸어가서 앞유리에 잔뜩 쌓인 눈을 홀랑 가림막과 함께 벗겨내리고, 사이드미러 주머니도 홀랑 빼서, 바로 시동을 켜고 유유히 차를 빼서 출발했다. 열심히 차를 발굴하던 사람들은 일순간 멍한 얼굴로 내 차를 쳐다봤다. 허허허. 이게 조선 오천년 삶의 지혜니라.


내가 살던 시카고 근교, 에반스톤 시는 시장이 얼마나 눈을 신속하게 잘 치우느냐로 결정난다고 할 정도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새벽 두시부터 픽업트럭 앞에 제설기를 붙인 크고 작은 트럭들이 돌아다니며 빠르게 눈을 치웠다. 미국은 보도가 한국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포장벽돌이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시멘트를 들이부어 반반하게 만든 길인데, 눈 치우기는 그게 더 나아 보였다. 거기도 인도 전용 눈 치우는 기계가 돌아다니며 열심히 길을 냈다.


낮이 되어 눈이 좀 멎으면, 그 광활한 주차장들을 둔 쇼핑센터들도 눈 치우는 트럭들을 불러 주차장의 눈을 길가쪽으로 전부 밀어 쌓았는데, 그 높이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운전하는 내내 눈의 만리장성을 볼 수 있었다. 도로에는 새벽부터 제설제를 왕창 뿌린다. 그래서 시카고에서는 중고차 사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새차도 5년만 지나면 밑이 부식되어서 녹이 잔뜩 끼기 때문이다.


한 번은 너무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런 너른 주차장을 둔 어느 한인교회에서, 어른들은 장년예배에 들어가 있고, 아이들은 밖에 나가 눈 싸움을 하고 논 모양이다. 뭐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 같지 않지만,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렇게 치워놓은 눈산에 목사 자녀 하나가 무너지는 눈에 파묻히고 말았다. 아이들은 우왕좌왕했고, 사태를 안 어른들이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아이는 숨이 멎은 뒤였다. 스키를 탈때도 가장 주의해야 하는 사고가 눈 쌓인 나무에 거꾸로 처박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질식이 시작된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얄궂은 사고가 있는지, 소식을 듣고 너무 막막해했던 기억이 있다.


시카고에 Polar Vortex라고 해서 극폭풍이 몰아쳐온 적이 있었다. 영하 32도를 넘는 추위에 그 거대한 미시간 호수는 호숫가부터 파도쳐오는대로 천천히 꽝꽝 얼어버렸다. 뉴스에서는 연일 절대 집 밖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내보냈다. 날씨 앵커가 밖에 장갑없이 있으면 3분, 5분 만에 동상 걸린다고 하는 날씨였다. 마스크 없이 숨 쉬는 것도 위험하다고 했다. 


그런 날 밤에 우리는 홍콩 집에 다녀오는 학교 친구 가족을 맞이하러 오헤어 공항에 갔다. 차에 난방을 최대로 하고 잔뜩 껴입고 탔지만 차안 온도는 영상이 되는 것 같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저 홑옷 외투 하나 걸치고 나온 그들을 보고 대경실색해서, 그들 짐을 나른다는 게 그만 장갑도 없이 날랐다. 그런데 정말 손이 짐가방에 쩍쩍 달라붙고, 엄청난 찬바람 때문에 손가락이 실시간으로 시커멓게 얼어갔다. 정말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추위였다.


하지만 따뜻한 집안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들으면서, 밖에 펄펄 내리는 눈을 구경하는 것은 그만한 별격이 없었다. 나는 눈만 보면 가슴이 뛴다. 괜히 신이 나고, 하얗게 덮이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고, 세상이 먹먹하게 적막해지는 것도 좋았다. 


내가 시카고에 좀만 더 오래 살았다면 금방 질렸을까.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에게는 폭설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지붕 무너질까 걱정도 해야하고, 동파도 걱정해야 하고, 집 차고에서 길가로 난 드라이브웨이의 눈을 치우는 것도 눈이 무거워 만만찮은 일이라고. 미국의 당*격인, 넥스트도어라는 앱에는 눈이 오면 중고등학생이고 성인이고 자기가 눈 잘 치운다고 불러달라는 알바글이 종종 올라오곤 했다. 


너무 건조해서 손가락에 거스러미가 쉽게 일어나곤 하는 한국 겨울을 지내다보면, 아주 가끔, 그 시커멓고 우울한, 시카고의 겨울이 생각날 때가 있다. 시카고 사람들은 눈을 귀찮아 하지만, 그래도 그 도시에 눈이라도 내려 지루한 일상을 하얗게 덮어주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눈이 없는 시카고의 겨울? 정말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꽁꽁 언 미시간 호수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다시 생각 나는 겨울이다. 공기가 맑고 차가운 날이면 쨍쨍하게 밝은 햇볕이 감사한 한국의 겨울도 좋지만 말이다. 





사진- 가림막 위에 눈 쌓인 우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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