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의 을씨년스러고 우울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집은 차를 끓여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만 그런게 아닌지, 시카고 카페나 상점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차와 찻잔세트를 파는 걸 종종 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토스트, 계란후라이, 그리고 홍차를 마시곤 했다. 점심 먹고 나서는 캡슐커피로 또 한 잔 마시고. 어둑어둑해지는 오후가 되면 또 물을 올렸다. 우리의 ‘애프터눈 티타임’을 위해서. 진하게 우려낸 홍차에 우유 데우는 기계로 데워낸, 살짝 거품이 있는 따뜻한 우유를 부어 밀크티로 만들어 마셨다.
처음에는 애틀랜타 어느 집에서 잡동사니를 마당에서 팔때 가서 1달러, 2달러 주고 산 소박한 하얀 도자기 차 주전자와 흰 찻잔에 마셨다. 그러다가 예일대에 놀러 갔을 때 방문한 ‘영국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꽤 그럴싸한 예쁜 차 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발견했다. 긴 도자기 손잡이가 달린 티팟과 찻잔에는 정원에 있을 법한 나비와 꽃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티팟과 찻잔과 받침 두 조 세트에 80여 달러라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사가지고 왔다. 우린 차를 자주 마시니까 이 정도 사치는 투자할만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내 친구들이 런던에서 영국 왕실에 차를 납품하는 포트넘 앤 메이슨 홍차를 여럿 보내줬다. 아내는 정통 영국 티타임을 위해서, 빅토리아 케이크라는, 전통적인 디저트 케이크도 구웠다. 그리고 영국 박물관에서 사온 티세트를 꺼냈다.
시카고는 애프터눈티를 마실 서너시면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버릴 때였다. KBS 클래식 라디오에서나 나올 법한 음악을 틀어놓고, 잘 우려난 포트넘 앤 메이슨 홍차를 쪼르륵 찻잔에 따른다. 향긋한 차 향기가 풍겨난다. 그리고 데운 우유와 프랑스산 각흑설탕을 한 조각 넣어 휘휘 젓는다. 그리고 빅토리아 케이크를 한 조각씩 떠서 각자 접시에 놓고 조금씩 떠먹는다. 달콤한 케이크 빵을 우물거리면서 밀크티를 호로록. 창 밖에 마침 눈까지 내리면, 그만한 여유와 사치가 또 없다. 너무나 흡족한 시간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어 집에 손님이 찾아와 머물다 간 적이 있다. 우리는 손님과의 애프터눈티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 스콘을 굽고 오이샌드위치 같은 전통적인 차 곁들임 음식을 준비하고 샴페인까지 더해, ‘하이 티High Tea’를 냈다. 원래 하이티는 다섯시 전후로 저녁 대신 먹는 티타임이기 때문에, 든든한 음식을 낸다. 테이블 위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거품이 뽀글 뽀글 올라오는 차가운 샴페인 잔들이 늘어서고, 손님이 오시면 항상 사다 놓는 생화 한 다발도 꽂아두고, 층층이 디저트가 올라가는 티티어tea tier에 샌드위치와 스콘을 놓았다. 거기에 훈제연어 샐러드도 더해서 내놨다. 홍차는 크리스마스시즌이라 토피향이 나는 것을 골랐다. 그리고 영화 ‘나홀로집에’에 나왔던 ‘캐롤오브더벨스Carol of the Bells’를 틀어놓았다. 이렇게 저녁식사 대신 가볍게 다과를 즐기면 살 안쪄(?) 하면서. 캐롤을 잔뜩 들으면서 웃고 떠들던 그 크리스마스 티타임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사진- 본인촬영. 한국집에서의 애프터눈티.
사실 날씨가 온화한 애틀랜타에서는 차를 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도시 주변의 프리미엄 아울렛에 가니 뜻밖에도 웨지우드 티세트를 파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누가? 이런걸? 물음표가 계속 떠올랐다. 나중에 애틀랜타 집 근처에 부촌 교회에서 전도행사하는 것을 보니, 각 집집마다 협찬을 받아 집들이 가지고 있는 티세트를 내놓고 하는 애프터눈티타임이 있었다. 거길 보니 웨지우드는 물론이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디자인의 아름다운 티세트들이 많이 있었다. 나이 드신 할머니들은 티타임에 입는 드레스에 모자까지 쓰고 왔다. 역시 귀족문화는 애틀랜타여.부촌 교회는 전도행사도 품위있게 하는구나.
일전에 내가 일했던 한인교회 영어사역부에서는 항시 비판적인 청년 하나가 자기는 사람들이 차 마시는 걸 무슨 대단한 일로 여기는 게 웃기다며, 차란 그냥 ‘냄새나는 물’ 그것뿐 아니냐고 냉소한 적이 있다.
글쎄, 냄새나는 물보다는… 따뜻한 물 한 잔도 향을 내어 마시고픈 행위, 사람다운 행위가 아닌가 싶다. 오스스한 추위를 털어내고 몸을 데우기도 하지만, 우울한 겨울에 데워야할 것은 몸만이 아니다. 마음을 데우는 일이다. 조용한 가운데 차를 쪼르륵 따르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다. 그것은 술 없이도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따뜻하게 데워진 몸과 마음으로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 작은 웃음도 더욱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가슴 아픈 이야기에는 눈물과 위로를 더한다. 내게 티타임이란 그런 시간이다. 가장 아름답게 시간이 흐르는 때, 그때가 티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