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 개의 그리스도교

그들은 왜 성조기를 흔드나

by 에반스토니언

주- 기독교, 즉 그리스도교에는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장로교 감리교 등)가 있다. 기독교=개신교가 아니다.



어제는 성탄절이라 일년에 한 번 가는 연중행사로 예배드리러 가기로 했다. 장소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꼬박 걸리는 성공회 서울대성당. 덕수궁 바로 옆에, 세종대로에서 잘 보이는, 98년 된 빨간색 지붕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성공회는 영국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잉글랜드 국가교회다) 우리 부부는 십여 년 전에 그곳에서 결혼예식을 올렸다. 나는 대학생 때, 군입대 전부터 그곳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나름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집에서 멀어졌기도 하고, 나도 시험에 들어서 지금은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는다. 한때는 신학박사 유학까지 했지만 말이다. 거기에서 온갖 못된 목사와 교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관두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 모 목사로 대변되는 ‘광장의 개신교’ 때문이었다. 어제는 차로 성당을 들어가려는데 막혔다. 대형스크린과 스피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캐롤찬송을 부르며 탄핵 반대 시위를 하는 ‘광장의 개신교인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가 행여 성당 안에까지 울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성당 마당에 들어섰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조용한 파이프오르간 전주가 흐르는 가운데 제대에 촛불이 고즈넉하게 타오르는, 오랜만에 와도 언제나 똑같은 그 분위기가 느껴졌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대 모자이크화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바깥의 소음 위로 대성당의 종이 서른 세 번 울렸다. 예배가 시작된다. 황금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십자고상을 들고, 유향 연기를 피우면서, 빨간색의 캐석(교회에서 입는 예복)을 입은 성가대와 예배에 순서를 맡은 이들이 주교관을 쓴 주교와 함께 줄을 서서 행렬하며 제대로 나아갔다.


이어지는 장중한 행렬을 보며 아무리 광장이 시끄럽다고는 하나, 누구도 고대로부터 이어진 이 장엄한 성찬예배의 전통을 감히 흐트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설교가 끝나고 성찬례 시간이 되었다. 주교가 예수가 마지막 만찬에서 한 말을 외며 축성한 대면병을 들어올리자 유향 향로가 흔들리며 연기가 높은 천장으로 올라가고 복사가 치는 종이 울린다. 모두가 성체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영성체 시간이 되자 신자들이 줄지어 성체와 성혈을 받으려고 줄지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의 성체,

아멘.

그리스도의 보혈,

아멘,


하며 사제에게서 성체를 받아 옆에 황금색 예식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에 찍어 성체와 보혈을 받았다.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큰, 동전 모양의 흰 면병에 포도주가 젖어들었고, 나를 그것을 입에 넣었다. 코 밖에서는 스모키 우디향의 유향 냄새가 진동을 했고, 입 안에서는 포도주 향기가 느껴졌다.


순식간에, 그 향내들과 함께 내가 이 성당에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안에는 군입대 전 마지막 눈물의 성찬례도 있었고, 새하얗고 발까지 내려오는 장백의를 입고 유향 복사를 하는 내 모습이, 아내의 손을 잡고 혼례 행렬을 했던 때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오감이 이 성당에서의 시간들을 외쳐부르고 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절박했을까. 그때는 왜 그렇게 날카로웠을까. 왜 그렇게 열심을 냈을까. 이제는 아이 손을 잡고 와서 내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때 그게 다 뭐였던가. 세월은 그렇게 흘렀는데, 모든 예식은 그때 그대로였다. 한때 젊었던 사제의 얼굴도, 고생과 고민으로 주름지고, 그 옆에는 젊은 부제들이 같은 세월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성당 밖으로 나와 발길을 돌리니, 곧바로 엄청난 소음과 함께 인파가 모여 무람없이 손을 들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캐롤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인지 시위인지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성당 안이나 밖이나 모두 똑같은 예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 미혼모 엄마의 품에서 태어나 서른 셋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그 청년. 그가 무슨 죄인가. 아니, 그가, 빈자와 약자와 함께 했던 그의 삶이, 성조기 흔드는 저들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광장의 개신교인들.’ 그들은 한국근현대 역사상 빈자와 죄인의 친구였던 적이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늘 똑같은 돈과 권력이다. 정의에는 신기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일제시대에는 친일에 발벗고 나서더니, 미군정 하에서는 선교사들 연줄을 통해 영어를 배우고 미국에 가 박사가 되어 와서 엘리트가 되었다. 이들이 믿는 그리스도교는 본토인 유럽에서 온 게 아니라 미국산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와 사유재산을 하나님이 보장하셨다고 믿는 이들이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부와 성공이 뒤따른다는 게 ‘미국식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다.


지금도 강남에는 대형교회들이 여럿있고, 개신교인 비율이 타지역에 비해 높다. 같은 식으로,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 비율도 높다. 대통령도 셋이나 냈다. 이승만, 김영삼, 그리고 이명박. 한국에서 빨리 성공하고 싶으면 그런 교인이 되는 게 훨씬 유리하다. 그들이 성조기를 흔드는 이유는, 미국이 개신교의 하나님을 믿어 부강한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한창 성공이 필요했던 고교 수험생 시절에는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 내가 시험에서 좋은 성적 얻고 좋은 대학 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라 믿었다. 지금도 수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이들이 있다. 모든 일이 다 나한테 신묘막측하게 잘 되면 할렐루야다. 하지만 신이 나라는 개인 하나 잘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더구나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서 나는 붙고 무고한 다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 여행가는데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자기에게만 잘해준다는, 뜨거운 감정체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 잘되기보다, 남이 더 잘되길 빌 수는 없었던 걸까. 나보다 옆집 불교 신자가 더 잘 되길 바라면 안 되나. 독실한 교인이라 술 안마시고 일요일 잘 지키는 거보다, 독실해서 더 진보적일 수는 없는건가. 독실해서 더 많은 이가 복지를 누리기를 바라서는 안되는 걸까. 이 천민자본주의의 혹독한 빈부격차와 무한경쟁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나만, 나부터, 살아남기만 바라는가.


신이 모두에게 베푼 공평의 만찬 자리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돈과 나 자신만 쫓으면 누구나 ‘광장교인’이 될 수 있다. 나는 그게 싫어서, 거기에 질려서, 한국 개신교를 ‘관뒀다.’





사진- 본인촬영. 성공회 서울대성당.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언제 크리스마스 트리를 철거하지? 딱 정해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