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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엘 다녀왔다

성공회 강촌 성 프란시스 수도원

by 에반스토니언

성공회 강촌 성 프란시스 수도원엘 다녀왔다. 성당 수련회를 하는데 그 바로 옆에가 우리가 묵는 성 요한 피정의 집이었다. 피정의 집은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강촌 성 프란시스 수도원은 세계성공회 안에 있는 성 프란시스 수도회 소속으로 뉴질랜드에서 온 크리스 수사가 한국에 세운 곳이다. 영어로 프란시스, 이탈리아어로 프란치스코인 성인은 11-12세기에 이탈리아 아시시에 '청빈, 정결, 순명'을 외치며 교회쇄신운동을 하며 수도회를 세운 사람이다. 그가 지었다고 알려지는 '평화의 기도'가 유명하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빈한 삶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 영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대자연을 통해서 신의 섭리와 은총을 느끼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가 새들에게 설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의 이름은 얼마 전 선종한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교황은 교회개혁의 상징인 성인을 자신의 교황명으로서 선택하고, 스스로 쇄신과 청빈의 삶을 몸소 보여주었다. 닫힌 교회문을 열어 수녀를 최초로 교황청 장관으로 발탁하고, 성소수자 커플들을 위한 축복예식을 마련했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에쿠스를 마다하고 기아차 소울을 타고,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위로해주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기존 교황이 쓰던 화려한 사도궁전을 마다하고 바티칸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묵는 숙소에서 살았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이 자기관리까지 빈틈없이 하는 예는 역사상 매우 찾기 어렵다.


강촌에 있는 이 수도회는 남자 수도회로,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세 명의 수사들이 있고, 그 중 한 분은 20년 전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이기도 하다. 수도회는 본래 교회쇄신운동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평신도 운동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수사, 수녀라고 해서 그들이 성직자인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수도회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겨울, 친구들과 일종의 '수도원 기행'을 하면서, 강원도 태백에 있는 대천덕 신부님의 '예수원'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한국에 소개한 대 신부는 미국성공회 소속으로 한국성공회와는 좀 결이 다른 성령운동을 하며 태백에 예수원 공동체를 세우고 선종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민주당의 부동산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거의 매년, 때마다 '피정'(Retreat)을 혼자 혹은 지인들과 2박으로 다녀오곤 했다. 피정은 '피세정념'의 준말로, 세상을 피해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곳에 가면 항상 평화와 쉼이 있었다.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수도회에는 '수도원장' 대신 '보호자 형제'가 있었는데, 스테판 보호자 형제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신교 사람들은 여기 수도원에 오면, 정해진 기도시간 외에도 성당에 들어앉아 하루 종일 성경보고 기도만 하다 가는데, 저는 그분들이 와서 마음 편하게 건강한 음식 먹고,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자연을 산책하면서 좀 쉬다 갔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사실 치유는 거기에서 일어나거든요.'


수도회는 세계 성 프란시스 수도회가 사용하는 성무일도서(Divine Office)를 사용한다. 성무일도는 매일 드리는 기도인데, 수도회마다 하루 세 번에서 일곱 번까지 기도시간을 지킨다. 이 수도회는 끼니 전에 아침, 정오, 저녁기도가 있었다. 기도시간이 되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러 성당에 모인다. 십자가 뒤는 통유리창으로 산등성이와 구름을 배경삼고 있었고 촛불이 말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도서에 있는 시편을 작게 읖조린다. 동틀때 발갛게 물든 하늘과 지는 해가 노랗게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도문을 외고 있노라면,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게 매년 수도회를 오가다가, 내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 그 2년 3개월 동안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내준 것이 바로 이 공동체였다. 그때는 내가 혹시 수도 청원자가 될까 해서 그러셨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수사님들은 그런 세속의 이해타산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그동안 연락이 끊겼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3년은 성당을 다니지 않고 냉담신자 생활을 하느라 연락드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성당 수련회 덕에 11년만에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 11년의 세월 동안 한 분은 결국 수도회를 떠났고, 청년에서 이제는 중년이 된 로렌스 수사 신부가 우리 가족을 환하게 반기며 맞아 주었다. 매번 혼자 혹은 친구들과 오던 나는 이제 아이와 아내와 함께 한 가족으로 왔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수사님은 신기하게도 며칠 전에 꿈에 내가 갑자기 나와서 요즘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셨다고 했다. 이심전심인가.


모든 게 혼돈이었던 젊은 날의 방황, 가끔 눈물을 흘렸던 나의 기도와 한숨, 열정과 사랑,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사님들과 따뜻한 국화차를 홀짝이며 이야기하던, 어느 겨울날의 추억까지,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느낌이었다.


그 시간 동안 대학교 엠티의 추억이 있던, 산과 강 옆에 있던 경춘선 강촌역은 폐역이 되어 새로운 역사로 옮겨갔고,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강촌나들목이 수도원 밑자락에 생겨났다. 그래서 '춘천시 남면 발산리'인 이곳도 개발의 바람을 타면 어쩌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 골짜기는 22년의 세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다.


수사님들과 맛있게 점심을 먹고, 핸드폰을 꺼놓은 나는, 어쩐지 슬슬 풀어지는 긴장에 몸이 녹초가 되어 흐드러지게 낮잠을 자곤 했었고 일어나서는 녹음이 우거진 산을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신기한 책들을 보기도 하면서 푹 쉬다오곤 했다. 친정같달까 외할머니집 같달까.


10년이면 강산은 무슨, 있던 내 고향도 상전벽해가 되어버리는 우리나란데, 오랜 시간 변치 않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와 의지가 된다. 내 영원한 마음의 본향같달까.





사진- 피정관에서 바라본 산


피정문의: 033)263-4662 체류비는 대략 정해진 금액이나 이상을 헌금하면 된다. 교단, 무교이든 상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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