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내게 이런 고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에반스토니언

요즘들어 가까운 지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도 있고, 어디에 터놓고 말할 데도 마땅찮은 사람들도 있고, 마음은 안 아프지만 몸이 아픈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엄살'이 아니다. 정말로 심각한 일들이다. 생계가 걸린 일도 있고, 자녀의 미래가 걸린 일들도 있다.


고통은 배려도, 예의도 없다. 고통이 찾아 올 때는 무슨 시간약속 잡아놓고, 내 전후사정 다 살펴서 올만할 때 오지 않는다. 옥상옥, 지금도 일상은 흘러가고, 해야할 일들은 시시각각으로 쌓이는 바쁜 때에, 심지어 이미 한 고통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중에도, 고통은 버릇없이 찾아온다. 정말 봐주질 않는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은 고통이 찾아오면,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다. 여러 고통들은 '기도 제목'(천주교에서는 기도지향)이 된다. 자신들도 간절히 기도하겠지만, 어떤 경우는 아예 시험에 들어 기도도 내려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은 고통이 찾아올 때, 두 가지 반응을 한다. 하나는 '내가 무슨 지은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이 찾아왔다고 믿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이니, 나를 연단해서 더 큰 일에 쓰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곤 한다.


성서에는 유명한 '고통의 책'이 있다. '욥기'다. 유명한 정치인들은 감옥에 들어갈 때 꼭 성서를 들고 들어가, '욥기'를 읽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이 욥기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욥기는 오래 전, 고대에 쓰여진 글이니, 당시 사람들에게도 '왜 내게 이런 고통이'라는 의문은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욥기의 많은 부분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다. 너무나 선량한 의인으로 살아온 부자 욥에게 어느날 자식들조차 한날 한시에 떼죽음하고, 가산은 모두 날아가고, 자신에게는 악한 피부병이 일어나 깨진 기왓장으로 가려운 피부에 피가 나도록 긁어야 했다. 아내마저도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왜 선한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가장 손쉬운 답을 내놓는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아무리 욥이 선인이어도 필시 무언가 잘못한 게 있어서' 고통이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욥에게 그런 일 혹시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채근한다.


지극한 고통 앞에서, '내가 혹시 무얼 잘못했구나'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가장 흔한 반응일 것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신을 진노하게 했다면서, 이유곡절을 불문하고 겸비하게 되어 신을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곤 했다. 그리고 신을 달래기 위해, 선한 일, 혹은 종교적 책무를 열심히 해다 바치기도 한다. 혹은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결국은 이 또한 다 지나며, 결국은 내게 다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바들이 그랬다. 그들은 고통에 대한 보통의 지혜 전통의 해석들을 욥에게 강요한다. '너 뭐 잘못한 거 있지!'


욥은 인상적인 반응을 한다. 자신은 그렇지 않으며, 심지어 신에게 대드는 것처럼 보이는 말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 고통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유한한 생각에 꿰맞추어 이해해보려던 자신의 시도는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욥기의 하느님은 함부로 사람을 시험해보려고 고통을 주시는 분도 아니고, 선행과 종교적 책무들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 하느님은 온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시계의 무수한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게 돌아가도록 하는 분이시다. 누구의 고통이 더 크고 작고 가리는 분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행위가 다 무위로 돌아가고, 자신의 신앙에 어떠한 대가나 보람이 없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끝까지 믿는 순수한 믿음을 바라는 신이다.


비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이 세상이 선보다 악이 더 넘쳐나서 망해버리지 않게 하는, 어떠한 '세상의 섭리,' 곧 사필귀정의 원리를 끝까지 믿는 것이다. 이 고통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르침도 주지 않더라도, 세상은 결국 선이 승리하기에 이제껏 유지되어 왔다고, 끝까지 믿는 굳은 신념이 필요하다.


신약성서에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대가없이 선량하게 살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악명높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쓴 글이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다. 원제는 '의미를 찾는 인간'이다. 여기에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극한 고통과 절망이 있었다. 아무리 의미를 찾아 인간으로서 신념을 잃지 않고 고상하게 행동한다해도, 결국은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끝나리란 것은 정해진 결말이었다. 모든 희망을 버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절망하여 똑같은 악인이 되어버린, 짐승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끝까지 선을 행하며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죽어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보게 된다. 바로 거기에 '고통의 의미'가 있다.


결국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설령 그 결말이 모두가 원하는, 의당 그래야할 거 같은 '해피 엔딩'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그 시련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와 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고통이 내 혼을 쏙 빼놓을지라도, 정신을 차리고, 여기에서 자신이 지켜야할 신념은 무엇이며, 해야할 일,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것, 나의 고통과 시련으로 인하여 겸손해지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시련 앞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차근차근 지나가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