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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밀의 화원 Sep 14. 2024

마흔 넘어 찾아오는 고민의 시간

2007년 임용 발령 이후, 치열했던 내 삶은 더욱 치열해졌다.

성실한 학생으로 12년, 사범대학 수석 졸업을 하기까지 4년, 교직 입문 17년 째.

누군가 나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인생은 '고(苦)'라는 한 글자 외에 그 어떤 답도 줄 수 없을 것만 같다.


요즘은 출근하면서 교통사고라도 나기를 염원하는 나를 발견한다.

지난 번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이상으로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전화를 받고나서

내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는 '혹시 정말 수술이라도 해야하면, 이참에 쉴 수 있을까?'라는

설렘(?) 가득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교직에 입문한 후에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해 육아휴직을 6년이나 했다.

내 인생에 드디어 '쉼(休)'이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ADHD를 가진 아들과 극도로 예민한 기질의 딸을 키우는 일은

학교에서 남의 자식을 키우는 일 못지 않게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6년이었다.

나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나를 위한 쉼은 여유롭지 않았다.


휴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고나니, 내가 느끼는 문제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내 아이들은 일에 치여 사는 엄마를 보며 밖에서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어떤 제안도, 훈육도 수긍하지 않는 반항심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해가 다르게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유형으로 다양화되어가고 있었다.

해마다 적응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식의 틀 안에 갇혀사는 나라는 사람에게 지금 만나는 학생들과의 소통은 쉽지가 않다.


시대변화에 적응해가야만 프로가 될 있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지만,

현실에서 부닥치고나면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특별한 사유없이 웃으면서 조퇴를 시켜달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농담으로 여기고 조퇴를 시켜주지 않았다.

현재 그 학생은 내가 조퇴를 시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학부모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나니 또 비난의 화살이 내게로 향한다.

또 어떤 분은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선생님이 혼을 내서라도 조퇴를 시키지 말아달라고 요구한다.

7 살에 당한 왕따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가진 아이는 관심을 원하지만 원활한 대화가 어렵다.

부모님과의 극한 대치로 입을 닫아버린 아이는 마스크를 절대 벗지 않고 타인과의 교류도 하지 않은 채,

위생에 대한 강박증으로 피부가 다 벗겨진 손등을 안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다.

교무실 문을 뻥 차고 들어와 간식을 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는

교사로서 내가 예의없는 행동에 대해 언급하고 행동교정을 요구하면(물론 화도 내지 못한다.)

트림을 꺽꺽 내뱉으며 대답을 대신한다.

수업시작부터 책상 위에 쿠션을 올려놓고 자는 아이들에게 베개를 치우라고 요구하면

그 반의 '짱'이라는 아이가 인권침해라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수업의 분위기를 흐린다.  


나는 이런 일상적인 패배감 속에 우울의 그림자를 집까지 끌고 들어가

내 아이들 앞에서 환한 미소도 한 번 보여주지 못하고,

늘  "엄마는 피곤하니까 저리 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남은 20년을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교사로서, 엄마로서. 나는 지금 어느 길에 서 있는 걸까?

서 있기는 한 것일까? 길도 아닌 어느 거친 땅바닥에 그저 주저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야 하는 길.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일까?

나로서, 교사로서, 엄마로서. 내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나는 이번 연휴동안 시댁과 친정을 오가야하고

시험문제 출제를 마쳐야 하고,

수행평가지를 모두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이런 고민의 시간조차 사치일수도.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내 딸과 함께 미술관 전시회에서 여유롭게 전시를 관람하고

딸이 가고 싶은 아트박스에서 사고 싶은 물건 즐겁게 쇼핑하며

눈 마주치고 웃을 수 있는 잠시의 여유만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마흔 넘어 찾아오는 수많은 고민과 선택의 시간 앞에.

이제는 더이상 주저앉아 있지말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무릎을 펴자.

제발. 이제는 좀 일어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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