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과 비난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나는 나로서 바로 서는 것이 버겁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아이들의 눈빛과 태도 앞에
내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순간순간 자각하게 된다.
왜 작년에 병원을 찾아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는 선생님들이
심심치않게 나왔는지 알 만하다.
나를 향한 그들의 습관적인 멸시는
어쩌면 내 삶의 깃털만도 못한 가벼움이다.
내가 죽음 앞에 당도하였을 때,
나는 무엇을 가장 안타까워할까.
더는 스치는 인연으로 만난 이 아이들을 위해
안타까워하지 않으리라.
미움은 그들의 손에 들린 짐일뿐,
내가 전해받지 않으면 그뿐.
오늘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오랜 고민이 묻어나는
메시지를 받았다.
더이상은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복지실에 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복지실에서 간식을 가져가고
보드게임과 포켓볼을 치면서 어질러놓고
수업종이 쳐도 가지도 않고 치우지도 않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업무처리 자체가 어려워졌고
이제는 더이상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는 간결했지만,
그 선한 분의 메시지 속에는 오랜 시간의 무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이 내 가슴에 깊숙히 박힌 것은,
그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그분의 무력감과 나의 무력감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더는 아이들로 인해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고,
규정에 따라 지도하면 그뿐.
더이상은 스치는 인연으로 만난 아이들이
내 삶을 휘저어놓도록 그냥 두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그들에게 평가받기 위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로서 표현되는 그대로 살아가면 그뿐.
교사로서의 자존감 앞에 내 인생을 거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으리라.
혹자는 이런 생각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난 오늘의 학교는 더이상 아이들과 긍정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웃으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이 완벽하지 않듯이 나 또한 완벽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부족함이.
나의 존재자체를 부정당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르치는 일에 사력을 다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다른 내 삶의 사명을 찾아
무너진 내 일상을 세우고
미성숙한 세계와 거리두기를 택하기로 한다.
교육이라는 거창한 간판 앞에 더이상 내 삶을 갈아넣지 않으리라.
내가 살아야 세상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웃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