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오작교 위에 선 달수와 설화
설화는 그저 평범한 소녀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와 달리 달수는 달이 바뀔 때마다 눈에 띄게 자라더니 조선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훤칠한 키, 무려 칠척(七尺, 180센티에 가까운) 장신으로 성장하였다. 얼굴은 마치 조각칼로 다듬어 놓은 듯 반듯했고, 어릴적부터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왔던 탓인지 어깨는 장군처럼 떡 벌어져 있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달수를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달수가 돌섬에 갈 때마다 호랑이와 맞서 싸운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언제나 사내들에겐 달수가 눈엣가시였지만, 양반가 규슈나 기생들조차 그의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니 달수는 벙어리라는 것만 제외하면 누구나 원하는 사내로 성장하였다.
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며 남매처럼 정을 쌓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설화가 열여섯이 되던 해였다. 자고 일어나니 설화가 잠들었던 자리에 하얀 이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 이불을 보며 설화는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게 뭐지. 나 이제 죽는겨?”)
(“며칠 전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긴 혔는디.”)
설화는 혼자 끙끙 앓으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아궁이에 다녀오다 방에 들어왔다.
“이게 뭐시여? 설화야,
이리 와서 궁둥이 좀 봐봐. 이게 뭐여 시방?”
설화는 더 놀라서 물었다.
“할매, 나 죽는겨?
기도 많이 혀서 나, 오래 산다 했잖여!”
“나 달수 오라버니한테 시집가야는디.”
“나 죽으면 동네 처자들이
달수 오라버니한테 들 끓듯 달려들텐디.”
그제야 설화는 자신이 달수를 단순히 오라버니가 아니라 남자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잠들기 전에 몰래 달수와 혼인하는 상상을 했고, 다른 처자들이 달수에게 관심을 보이지 못하게 일부러 오누이처럼 행동하며 그 곁을 지켰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게 아니여.
너도 인자 달거리 하는거여.”
“아이고, 우리 강아지가 이제 진짜로 색시가 다 됐구먼.”
“여자가 달거리를 혀야, 진짜 여자가 되는 것이여.”
“그래야 혼인도 하고, 아기도 낳는 겨.”
설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 이제 시집가도 되는겨?”
할머니도 그런 설화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말했다.
“우리 설화, 달수 좋아하드냐?”
“달수랑 혼인하고 싶었느냐?”
할머니는 그런 설화를 놀리듯 연신 물었다.
“아니 고것이 아니라, 일단 죽을병은 아니다 이거지 할매?”
할머니는 그런 설화가 마냥 귀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강아지야, 그것은 달거리랑께.”
“긍게 우리 설화도 인자, 엄마가 될 수 있다 이 말이여!”
설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뭣이여.. 내가 아기를 낳는다고?”
설화는 혼자 상상에 빠지며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그럼 나 이제 시집가도 되는겨? 진짜여?
그럼 더는 달수 오라버니 동생 행세 안 해도 되는겨?”)
할머니는 그런 설화가 마냥 귀엽고, 잘 자라준거에 대해 감사했다.
“자, 이제 씻을 준비혀라.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우리 성님한테 알리러 가야겠다.”
설화는 사슴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할매 설마 달수 오라버니헌테 말하는 건 아니지? 진짜 말하면 안 돼! 나 창피혀!”라고 소리쳤다.
“아이고, 이 가시나야.
그 순둥이한테 말해줘도 뭔 말인지도 모를 것이여”라며 웃었다.
할머니는 곱게 물든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맑은 물에 붉은 물이 번져 마치 벚꽃 잎을 우려낸 것처럼 분홍빛이 돌았고, 그 물길 따라 그동안의 고생과 설움도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불을 깨끗이 널고 난 후 곧장 꽃분이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성님! 성님 동상 왔소! 퍼뜩 나와보쇼!”
꽃분이 할머니가 나와 물었다.
“뭔 일이여? 어디 불이라도 난겨?”
설화의 외할머니가 말했다.
“성님, 고것이 아니라.
우리 설화가 글쎄 달거리를 했당께.”
꽃분이 할머니는 놀라며 말했다.
“참말이여? 꼬맹이가 벌써 그리 됐단 말여?
아이고, 나 웃음 나와 죽겄네.” 라며 기뻐했다.
한참을 기분이 좋아 웃던 꽃분이 할머니의 얼굴엔 걱정이 내려앉았다.
“근디 인자부터는 진짜로 몸 조심해야 쓰겄네.
요즘 결혼 안 한 처자들만 골라 보쌈해 간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잖여! 자나 깨나 조심 또 조심해야제.”
설화 외할머니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성님, 그려서 말인디, 우리 설화 올 겨울 지나고
달수랑 혼인시키면 어떨까 싶소.”
꽃분이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우리 달수랑?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디 어찌 혼인을 혀.”
설화 외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성님. 내가 가만 본께, 우리 설화가
달수를 연모하고 있드랑께?”
“달거리 하고 자기가 죽는 줄 알고 울면서 ,
달수 오라버니한테 시집도 못 가고 죽는다고 난리가 났당께.”
꽃분이 할머니는 내심 듣던 중 반가운 소리란 듯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게 참말이여? 설화가 우리 달수를?”
“맞당께 성님. 나도 설화가 달수를 그저 오라버니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는디,
이 콩알만 한 것이 어릴 적부터 달수를 마음에 품고 있었더라고.”
꽃분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우리 설화가가 내 손주며느리가 돼주면 고맙제.”
“성님 내가 우리 설화 잘 가르쳐서 보낼텐게,
우리 달수랑 혼인시킵시다.”
“근디 달수 속 마음도 함 들어봐야는 거 아녀?성님?”
“아니 우리 달수도 가만 본 게 설화를 맴에 품고 있는 거 가텨. 근게 가도 맨날 똥강아지처럼 설화 뒤꽁무니만 쫓아다녔겄지.”
“내가 본 게 설화랑 혼인하라 하면 분명 못 이기는 척 할 것이여! 가만있어보자. 이럴 때가 아녀 시방.”
그렇게 두 할머니는 조심스럽지만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견우와 직녀를 연결해 주는 오작교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꽃분이 할머니는 지게를 지고 산에 가려던 달수를 붙잡았다.
“달수야, 이리 앉아봐라. 할매가 할 말이 있다.”
달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앉았다.
“너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지 않느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수는 당황한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이 늙은 할망구랑만 살 거여?
너도 네 색시 얻고, 네 새끼도 낳고 살아야지.
평생 나무만 하며 살 거여?”
달수는 듣기 싫다는 듯 일어나려 했지만, 할머니가 진지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 요즘 소문 들었제? 혼인 안 한 처자만 골라서
보쌈해 갖고 기생으로 판다고들 하잖여.”
“설화가 만약 그런 놈들에게 끌려가면 어쩔 것이여?”
그 말을 듣자마자 달수의 눈이 커지며 몸이 굳었다.
잠시 후 그는 두 팔을 저으며 안절부절못하더니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하며 자신이 설화와 혼인하겠다고 표현했다.
그제야 꽃분이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놈이, 너도 설화를 맘에 품고 있었구만?”
“설화가 다른 남정네한테 시집가는 거 싫지?”
“설화가 보쌈당하는 건 더더욱 싫고 너도?”
달수는 눈가가 붉어지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려, 그럼 올 겨울 지나고, 내년 봄에 설화랑 혼인허자. 너도 설화랑 혼인하는 거 좋지?”
호랑이도 때려잡게 생긴 달수가 수줍은 소녀처럼 환하게 웃는다.
그날 이후 달수는 더 열심히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무를 하고 산에서 귀한 약초들도 캐왔다. 두 할머니와 설화는 그런 달수를 보며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달수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눈만 뜨고 있으면 산에 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설화는 달수를 보며 혹여 산짐승이라도 만나 해를 입으면 어쩌나, 몸이 상하면 어쩌나 매일을 걱정했다. 하지만 달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혼인 준비라도 하듯 묵묵히 매일 산에 올랐다.
설화 또한 달라졌다. 전에는 어린아이처럼 할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응석만 부렸지만, 이제는 스스로 할머니보다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고 기도를 하기 위해 할머니가 새벽 우물길을 나설 때면 설화 역시 할머니와 그 길을 함께 걸었다. 둘은 이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설화는 할머니께 밥 짓는 법, 장 담그는 법, 반찬 만드는 법, 바느질, 다듬이질까지 하나하나 물어가며 배워갔다.
둘은 그렇게 조용히 혼인할 날만 기다리며 서로에게 좋은 짝이 되기 위해 연습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설화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달수의 아내가 된 모습을 그려보았고, 달수 역시 나무를 지며 설화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두 할머니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가슴 깊이 안도와 설렘, 기쁨을 품었다.
그날, 하얀 이불에 스며든 붉은 단풍빛은 단순한 달거리도, 흔한 피멍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소녀가 여인이 되어가는 첫 징표였고, 피처럼 뜨겁고 물처럼 흘러가는 운명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달수와 설화는 서로를 오누이처럼 여기며 자라났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부터 피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잔잔히 자라나고 있었다. 차가운 돌섬 위에도 가을이 내려앉고, 나무들은 마치 두 사람을 축복하듯 알록달록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