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천당의 문이 열리는 순간

제16화: 서두름은 길을 닫는다.

by 최해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서둘러야 할 때도 있고, 한 걸음 멈춰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꽃그늘 아래 누웠지만, 천상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별이 뜨지 않아도 환했다. 어둠이 없다는 것은 편안함과 비슷했으나, 연화에게는 오히려 무서운 일이었다. 어둠이 없으면, 시간도 사라진다. 천당은 그렇게 사람을 붙잡는 곳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수아는 연화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쉬었다. 아기의 숨결은 너무 가볍고 일정해서,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희미하게 만들었다. 연화는 원이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원아.”


“네.. 어머니..”


“아버지 얼굴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느리라.”


원이는 아주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사실 아버지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요.”


연화의 손끝이 굳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원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그려 냈었다.


“아버지 눈썹은 숱 검댕이 같이 검고 진해요.”


“아버지 목소리는 어머니처럼 항상 상냥해요.”
그렇게 말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원이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다. 원이의 말을 듣고 나니 연화는 더 빨리 이승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마침 꽃들 사이로 기척이 다가왔다. 연화 어머니 설화였다. 설화는 늘 연화와 원이에게 부드럽게 웃었지만, 오늘은 왠지 낯설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 없었다.


“연화야.”


“네. 어머니 오셨어요.”

설화는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눈빛보단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어느새 이곳에서도 며칠을 보냈구나.”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지 않으니 하루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설화는 잠시 꽃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곳은 해가 완전히 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천당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


“편안한 곳에서의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 보니,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는 것이란다.”


편안함이라는 이름의 익숙함

연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머니.. 이곳에서의 하루는 이승과 다르다 하셨지요?”


설화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연화의 가슴은 더 쿵쿵거렸다. 설화가 마침내 낮게 말했다.


“이곳의 하루는 사실 이승의 세 해와 같다고 한다.”


연화의 심장이 떨어졌다.

“세.. 해요?”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정확한 계산을 하진 못한다.”


“하지만 신들이 오가며 나눈 말들을 내가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이승에서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 무단히 애써 왔단다. 하지만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놓지 않기가 나도 참으로 힘이 드는구나.”


(이승에서 세 해라면, 서방님과 아버지는 우리의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연화는 원이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가야 해요. 당장”


설화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연화야.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화는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설화는 꽃잎 하나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꽃잎은 바람이 없어도 흔들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규칙이 그것을 흔드는 것처럼.


“천당과 이승을 잇는 문은 열릴 때가 따로 있다.”


“문이 열려야만이, 너희는 내려갈 수 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문은 어디에 있나요?”


설화는 원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 문을 찾지 못한다.”


“허나.. 내 예상이 맞다면.

원이에게는 그 문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원이가 바로 천당과 이승을 통하는 열쇠이니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원이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왜 그러느냐 원아?”


원이의 손가락이 허공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작은 문이 문이 생겨나요.”


“근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요.”

연화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연화에겐 꽃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되었다!)


(이승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어.)


(지금 가야 돼! 이제 곧 가야 돼!)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이승의 문이 또 열릴지 몰라.)


(서둘러! 서둘러야 돼!!)

꽃들의 대화가 연화에게 들리던 순간이었다.


설화가 원이에게 말했다.

“원아. 저 문이 또렷해지면,

어미와 이 할미에게 꼭 말해야 한단다.”


그때 연화의 귀에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 연.. 화...”


순간 연화의 몸이 굳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했다. 너무도 그리웠다. 연화는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서방님..?”


설화가 눈을 감았다.

“들었느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맺혔다. 천상에서 맛도 감정도 연해지는데, 그 목소리만은 연해 지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경계는 늘 가장 좋은 얼굴로 사람을 속인다 했으니까.


연화는 원이의 손을 꽉 잡았다.

“원아.”


“아버지가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문이 또렷해지면 꼭 말해야 한다.”

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원이가 숨을 들이켰다.

“어머니!! 문이 또 보여요!!”

연화는 원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손을 뻗자, 허공이 딱딱하게 닿았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처럼. 차갑고, 무겁고, 배고픈 문. 그때 느린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너무 분명해서, 귀가 아니라 뼛속으로 들렸다.


(돌아가라.)

원이도 그 소리를 들은 듯,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경계를 넘는 자는 대가를 치른다.)


연화는 수아를 더 꼭 끌어안았다. 수아의 체온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원이의 눈동자가 문 너머를 향해 흔들렸다.


“어머니..”


“문 너머에 누가 서 있어요.”


연화는 원이를 감싸 안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털끝하나 손대면 나 가만있지 않겠소!”


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우린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오!”


문은 여전히 흐릿했다. 분명 이승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지나가도 되는 길’은 아니었다. 연화는 그 앞에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서두르는 순간, 문은 다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연화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지만, 문은 여전히 또렷해지지 않았다. 허공은 단단하게 막혀 있었고, 그 너머는 흐릿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길은 열리고 있었으나, 아직 건널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마치 문 스스로가 때를 고르고 있는 듯했다.


기다림에 담긴 뜻

“어머니.. 아직인가요.”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은 아니다.”

연화의 시선이 다시 문으로 향했다.


“문이 분명 열리고는 있는데요.”


“열리는 것과 건너갈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설화의 말은 단호했다.


“원이야.”

설화가 조용히 불렀다.


원이는 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할머니.”


“문이 지금 어떻게 보이느냐.”


원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있긴 한데.. 자꾸 흔들려요.”


“가까이 가면 흐려지고요.”

설화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직 네 마음이 다 닿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화가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설화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연화야, 더 가지 마라.”


“지금 네가 움직이면, 문은 다시 숨는다.”

연화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설화는 원이에게 다시 말했다.

“원아, 억지로 보려 하지 말거라.”


“문은 찾는 자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원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리면 돼요?”


설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래.”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여는 것보다 더 중요한것 같구나.”


원이는 숨을 고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었지만, 그 형체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문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나타날 때마다 조금씩 위치가 달라졌다. 그 변화는 아주 미세했지만, 의미 없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문은 점점 원이에게 가까워지고 있었고, 동시에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듯 보였다. 원이가 조급해질수록 문은 멀어졌고, 숨을 고르면 다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연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이 문은 눈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맞춰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다 조급해질 때가 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다 놓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것 같은 순간들. 그럴 때는 꼭, 마음이 앞서서 몸이 따라오지 않는다. 뭔가를 붙잡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손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조급함을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잠시 멈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16화모든일에는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