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천당의 경계를 넘은 뒤

제17화: 시간은 대가를 요구한다.

by 최해주

연화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서두르면 안 된다는 걸.. 천상은 조급한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곳이었다. 급해질수록 길은 더 흐려졌고, 붙잡으려 할수록 문은 멀어졌다. 원이의 눈은 문에 고정돼 있었다. 설화가 조용히 원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원아.”


“네, 할머니.”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거라.”


“이 문은 마음이 먼저 닿아야 열린다.”


원이의 입술이 떨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설화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연화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이승에 두고 온 마음을 떠올리거라.”


연화는 그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았다. 윤이었다. 윤의 얼굴, 윤의 목소리, 윤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 연화는 원이의 손을 꽉 잡았다.


“원아.”


“아버지를 떠올려 봐.”

원이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손이요.”


“제 머리 쓰다듬어 주시던 손이 생각나요.”


그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꽃밭의 향이 멎고, 천상의 빛이 잠시 흔들렸다. 허공에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처음에는 실금처럼 보였지만, 그 선은 천천히 길어지고 넓어졌다. 마침내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서 있었다. 문이었다. 이번에는 연화도 분명히 보았다. 문 너머는 흐릿했고,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였다.

연화는 숨을 삼켰다.


“서방님..?”

입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돌아가라.)

그때 낮고 느린 목소리가 울렸다.


(경계를 넘는 자는 대가를 치른다.)

원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연화는 수아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기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천상에서처럼 가볍지 않았다. 조금씩 무게가 생기고 있었다.


“연화야.”


“지금이다.”

설화는 연화를 향해 말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


“이승은 앞을 보고 가야 하는 곳이다.

이 어미가 애타게 불러도 앞만 보고 가야하느리라! 명심해라!

연화는 그렇게 힌번 숨을 고르고, 발걸음을 문 안으로 천천히 내디뎠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빛이 사라지고,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곧바로 통증이 밀려왔다. 배 아래가 찢어지는 듯했고,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승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살아 있다는 감각이 날카롭게 몸을 찔렀다.


으악....!”

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몸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승 도착

연화는 무릎에 차가운 감촉이 닿으며 정신을 차렸다. 숨을 들이마시자 목이 탔다. 공기가 무거웠다. 이승의 공기였다. 그때, 수아의 울음이 터졌다. 크고 선명한 울음이었다.


“원아..!”

연화가 고개를 돌리자, 원이는 옆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우물 앞을 가리켰다.


“어머니. 저기..”


우물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 백발이었다. 머리와 수염이 모두 희었고, 옷은 낡아 있었다. 세월이 그 사람 위에만 오래 머문 것 같았다. 연화는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숨이 멎었다. 맑고 그윽한 눈. 늙어 있었지만, 너무도 익숙한 눈이었다.


“.. 연화..?”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윤의 목소리였다.


“서방님..?”

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다가, 무너지듯 다가왔다. 손끝이 떨리며 연화의 뺨을 만졌다.


“꿈이냐.. 내가 또 꿈을 꾸는 게냐..”


“아니여요. 서방님..”


“저.. 돌아왔어요.”

윤은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살아 있었구나..”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다....”


윤과 재회

자그마치 열다섯 해였다. 천상에서의 며칠. 이승에서는 세 해. 그 시간이 몇 번이나 흘러간 뒤였다. 윤은 우물 가장자리를 쓸며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다 포기하라 했지.”


“그래도 나는 여기서 떠나지 못했다.”


“한 번.. 딱 한번 나는 이 우물 속에서 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


윤과 마주한 얼굴, 열다섯 해를 건너온 시간,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연화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 품 안에 있던 아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아야..?”

연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품 안에도, 발치에도 아이는 없었다. 연화의 숨이 급해졌다.


“원아..?”

원이도 보이지 않았다. 연화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 순간, 몸이 낯설게 무거워졌다.

다리 관절이 삐걱거렸고, 허리가 순간적으로 굽는 느낌이 들었다.


“... 서방님.”

연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없어요.”

윤도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우물 근처에, 낯선 아이들이 서 있었다. 아니, 연화의 아이 들이라기엔 너무 컸다. 남매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분명, 연화가 알고 있던 아이들의 옷과 같은 천이었다. 윤이 숨을 삼켰다.


“.. 설마..”

연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큰 아이가 연화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연화는 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 눈이었다. 원이의 눈이었다.


“어머니?”

그 한마디에, 연화의 다리가 풀렸다.


“원아..?”


“어머니!, 아버님!”

두 아이는 그대로 연화와 윤에게 안겼다.


연화는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연화의 몸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 아..”

연화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연화야!”


경계를 넘은자의 대가

연화의 손이 떨렸다. 손등의 피부가 눈에 띄게 쭈글거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끝이, 한 올씩 희어지고 있었다. 연화는 그제야 깨달았다. 경계를 넘는 대가가 이제야 시작되었다는 것을. 천상에서 멈춰 있던 시간이, 이승에 닿는 순간 한꺼번에 덮쳐오고 있었다. 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출산의 고통보다도, 그날 우물 속에서 느꼈던 고통보다도 더 깊고 오래된 통증이었다.


“괜찮아요.. 저는 다 견딜것이어요.”


“아이들만 무사하다면, 서방님만 살아계신다면 저는 어떠한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어요”


연화는 알고 있었다. 이 고통은 잠시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경계를 넘은 자는 반드시 그 시간을 몸으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멈췄다.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문장마다 다시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라질 수 있어도 시간은 늘 앞으로만 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기다림은 희망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더는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반드시 지켜야 할 내 사람들.
이 글은 결국 사라진 시간을 붙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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