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작은 선행

18화: 은혜 갚은 새끼 사슴

by 최해주

아이들만 무사한다면, 서방님만 살아계신다면 어떠한 고통도 다 이겨낼 거라는 연화의 다짐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스러운 아픔에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그 다짐은 말이 아니라 숨이었고, 숨이 끊어지지 않게 붙드는 마지막 끈이었다.


“어머니.”

원이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이미 어린아이다운 떨림보다는, 시간을 건너온 자의 침착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 원아.”

연화는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들에는 자신이 알던 시간보다 더 많은 계절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원이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문을 넘을 때부터였어요.”


“이승에 다 닿기 시작하자 저는 제가 커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아이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순간 입고 있던 옷이 커진 몸으로 인해 찢겼고,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은 것 같고 참으로 신기했어요.”

그 말은 아이가 겪은 변화가 단순한 성장만은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이의 말을 듣자마자 연화의 몸에 다시 통증이 스쳤다. 우물 속의 출산의 고통 때 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꼈고 연화 또한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피부가 땅기고, 숨이 짧아졌으며, 몸속 깊은 곳에서 시간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이는 이런 기괴한 현상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시간에 휩쓸린 그림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움이 밀려왔다.


“연화야..”

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화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고도 쉽게 닿지 못한 채 잠시 멈췄다.


“서방님 저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셔요..”

연화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말끝이 흐려졌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금 이 통증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연화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숨을 놓지 않았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뒤,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아의 하급 관리 차림이었다. 그들은 우물가를 둘러보며 서로 눈짓을 나눴다. 백발, 세월에 닳은 얼굴. 잠시 시선을 머물렀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관의 사람은 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윤의 차림새를 보곤 그들은 찾고 있는 인물과는 겹치지 않는 듯 발길을 다시 돌렸다. 연화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돌섬의 보금자리

그날 밤, 이들은 우물가를 떠났다. 길을 택한 것은 윤이었지만, 방향을 정한 것은 연화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돌섬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죽음의 섬이라 불렀지만, 윤과 연화에게 돌섬은 무엇보다 안전한 곳이었다. 기억이 시작된 장소는 언제나 끝을 숨겨 주는 법이었다. 윤은 아이들을 한 번 돌아보며 낮게 물었다.


“아버지를 잘 따라오너라.

원이는 동생 잘 챙겨서 와야 하느니라”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그렇게 연화를 등에 업고 거친 돌섬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발밑의 돌은 날카로웠고 숨은 점점 가빠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방님. 이제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어서 내리셔요.”


“지금은 그저 내 등에서 푹 쉬거라..”

그 말에는 명령이 아니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때 마침 숲 앞쪽에서 기척이 움직였다. 사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 이들 앞에 잠시 섰다. 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연화는 사슴의 목소리를 이미 들은 것 같았다. 천상에서 들었던, 길을 인도하는 존재의 숨결과 닮아 있었다.


“서방님. 저 사슴을 따라가면 될 것 같습니다.”


“사슴이 우리에게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그래.. 고맙구나..

이 은혜는 잊지 않겠느리라.”

연화가 사슴에게 말했다.


사슴은 몇 걸음 옮겼다가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려 이들이 오는지를 확인했다. 윤은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앞으로 보냈다. 이 길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이 순간만큼은 받아들였다. 한참을 사슴을 따라가자 큰 바위가 보였다. 바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멀리 서는 보이지 않았던 바위에 좁은 틈이 보였다. 사람 한 명씩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틈이었는데 연화를 등에서 내리고 윤이 바위틈에 들어가 보니 사람 열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수 있는 넓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은 들어왔던 갈라진 틈 사이로 해가 들어와 깜깜한 동굴을 밝게 비출 수 있었고 습하고 축축한 동굴이 아닌 바람과 비 모두 피할 수 있도록 평평하고 안전해 보였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숨기기 위해 비워 둔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래 여기구나. 여기가 딱 좋겠구나.)


가장의 무게

윤은 다시 나와 아이들을 바위틈으로 들여보낸 뒤 연화를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는 입구를 한 번 더 살폈다. 혹시 남은 흔적이 없는지, 바람의 방향은 안전한지 확인하듯이. 그날 밤, 이들은 동굴 안에서 몸을 눕혔다. 아이들은 서로 기대 잠들었고, 윤은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연화는 마지막으로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바람만이 낮게 숨을 골랐다. 그 고요 속에서 연화는 알았다. 오늘은 살아남은 날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잠시 뒤, 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연화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화야. 잠깐 다녀오겠다.”

연화는 몸을 일으키려다 멈추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것조차 아직은 버거웠다.


“무리하지 마셔요..”

윤은 고개를 저었다.


“불도 피워야 하고, 아이들 먹을 것도 있어야 한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산길은 어둡고 깊었다.

윤은 발밑을 살피며 마른 가지를 꺾고, 나무 아래 떨어진 잔가지를 모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불을 붙이기엔 충분해 보였다. 숲을 더 둘러보던 중, 낮에 보았던 사슴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발굽 자국은 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덤불 사이로 작은 열매들이 붉게 익어 있었다. 윤은 조심스럽게 열매를 따 손수건에 감쌌다. 먹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슴이 다닌 자리라면 크게 해롭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슴의 인연

그때,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이 멈춰 서자 숲 사이로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미 사슴 곁에 작은 새끼 사슴이 바짝 붙어 있었다.

윤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또 만났구나..”

사슴은 달아나지 않았다. 몇 걸음 다가왔다가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숲의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가다 다시 돌아보며 윤이 오는지를 확인했다.


“알겠다. 따라가마.”


사슴이 데려간 곳에는 열매가 더 많이 열린 나무가 있었다. 바닥에도 여러개가 떨어져 있었고, 새끼 사슴은 그중 하나를 입에 물고 서툰 모습으로 씹고 있었다. 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열매를 더 따 품에 안았다.

잠시 뒤, 사슴은 멈춰 섰다. 더는 길을 안내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흔들더니, 새끼 사슴과 함께 숲 속으로 사라졌다.

동굴로 돌아왔을 때, 연화는 여전히 잠들지 못한 채 아이들 곁에 앉아 있었다. 윤이 안고 온 땔감과 열매를 내려놓자, 연화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윤은 돌을 모아 작은 불자리를 만들고 불을 붙였다. 불꽃이 살아나자 아이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듯 했다.


은혜 갚은 새끼 사슴

윤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문득 사슴의 모습을 떠올렸다. 숲으로 사라지기 전, 몸을 돌렸을 때 사슴 궁둥이쪽에 보였던 하얀 하트 반점.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던, 작고 둥근 자국이었다. 그 모습이 오래전 기억 하나를 건드렸다.


십여 년 전쯤, 사냥을 나갔던 날이었다. 활을 당기다 멈췄던 순간, 어미 사슴 곁에 바짝 붙어 있던 새끼. 그 새끼의 궁둥이쪽에 있던 반점과 같았다. 그날 그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활을 내렸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없어서 멈췄을 뿐이었다.


(설마 그때 그 새끼 사슴이었을까.)

윤은 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윤은 알 것 같았다. 사람이 우연처럼 베푼 작은 선택 하나가, 언젠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몸을 사리게 된다. 잃을 것이 없을 때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지만, 지켜야 할 존재가 생기면 한 발을 내딛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진다. 그 ‘지켜야 할 것’이 자식이라면, 사람은 달라진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싸우고, 물러서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틴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옥 같은 자리로 향해서라도 그 앞을 막아서게 될것이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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