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일에는 때가 있다.

제15화: 기다림과 윤회 사이에서

by 최해주

연화는 이곳에서 눈을 뜰 때마다 잠시 헷갈렸다. 숨이 가쁘지 않았고, 몸이 아프지 않았고, 갓난아이의 울음조차 천천히 번져 나왔다. 마치 모든 소리가 솜 위에 내려앉는 듯했다.


“오늘이 이승에선 며칠이 지난 걸까.”


그 생각은 천상에서는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이곳의 법이었다. 연화는 품에 안긴 딸, 연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이제 조금 붉은 기가 돌고 있었고, 우물 속에서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이곳의 공기와 빠르게 어울리고 있었다.


“연아..”

연화가 속삭이자, 아이는 작은 손을 움찔하며 눈을 꿈틀거렸다. 울지는 않았다. 천상의 아이들은 배가 고파 울지 않았고, 통증으로 울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원이가 꽃밭 너머에서 달려왔다.


“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연화는 아이가 오는 걸 먼저 느꼈다. 이곳에서는 소리보다 기척이 먼저 도착했다.


죄질에 따라 천상에 사는 모든것


“여우 누나랑 나비 봤어요!”


“그랬구나. 나비가 정말 아름다웠지 원아?”


원이의 눈이 반짝였다.

“네! 어머니오늘은 나비 날개에 글씨가 더 선명히 보였어요!


연화와 원이가 우물 속에 나와 처음 보았던 커다란 꽃들과 나비의 날개에 새긴 반짝이는 글자들. 그건 글자이기도 했고, 자세히 보니 글자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연화는 처음 그 나비들을 보았을 때, 단순히 천상의 장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그 흰나비들은 이승에서 죽고 천상세계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연화의 어머니 설화는 그 사실을 아주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연화야.”


“저 나비들은 말이다..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

천상에서는 말보다 머뭇거림이 더 많은 설명이 되었다.


“이승에서 아주 큰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환생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삶도 아니었던 혼들이란다.”


“그럼 지옥에도 가지 못한 건가요?”

연화의 질문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했던 사람.”


“남의 몫을 조금씩 탐냈던 사람.”


“자신만을 위해 눈을 감았던 사람들.”


“아주 작지만, 반복된 죄들이 쌓인 혼들이지.”


연화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하얀 날개는 눈부셨고, 움직임은 조용했다. 벌을 받는 모습이라기엔 너무 평온해 보였다.


“그럼 저 나비들은 환생하지도 못하는 건가요?


“그렇단다..

지옥에 가긴엔 그 죄가 너무 가볍기에..”

어머니는 단정하게 말했다.


“사람으로도, 동물로도 아닌 채로

천상에서 살아가는 게지.”

연화는 숨을 삼켰다.


“혹시 그러면 저 말들을 하는 꽃들도 똑같은 걸까요?”

연화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큰 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 천상의 모든 식물과, 동물, 사람들은

이승에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 죄질에 따라 천상에 와서도 사람으로 살아가거나, 환생하거나, 신이 될 수 있거나 한단다. ”


나비들은 꽃 위를 날며 꿀을 모았다. 천상의 꽃은 꿀이 넘쳐났지만, 단맛은 없었다. 배를 채워주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를 유지하게 할 뿐이었다.


천상에서의 기회

천상은 벌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머무는 시간은 형벌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미뤄지는 시간과 가까웠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이곳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어머니! 어머니!

여우 누나가 말해줬어요.”

원이의 말에 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원아.

누나가 뭐라고 하더냐?”


“나비들이 열심히 살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대요.”


“열심히라니?”

원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이답게 말했다.


“거짓말 안 하고, 욕심 안 부리고, 꽃들도 도와주고..또.. 또.. 뭐가 있었지...”


“아!! 그리고 지금은 착한 일 하면서,

기다리는 거래요!!”

연화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다림.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자, 가장 무거운 말..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

천상에는 배고픔이 없었다. 병도 없었고, 싸움도 없었다. 그러나 맛도 없었다. 연화는 어느 날, 어머니가 내어준 열매를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지만, 단맛도 신맛도 없었다.


“맛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렇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히 드냐.

맛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미소 지었다.


“그것은 곧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모든 음식들을 먹는 사람,

동물들은 맛을 느낄 수가 없단다.”




“이승에서의 사람만이 느꼈던 소중한 감정들은

천상에선 모두가 느낄 수가 없느니라..”


“먹고 싶다는 마음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느낄 수가 없느리라.”


연화는 문득 이승의 밥상이 떠올랐다. 허기진 배로 먹던 보리밥, 비록 까슬거린 보리밥과 감자 한 덩이에도 느껴졌던 살아 있다는 맛 그곳이 그립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긴 오래 머물면 안 되는 곳이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편안함은 사람을 붙잡아 두거든.”

원이는 천상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동물들과 말을 섞었고, 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여우 누나의 꼬리를 따라다니며 웃었다.


“원이야.”

연화가 부르자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네! 어머니?”


“원이는 여기가 좋으냐?”


원이는 잠시 생각했다.

“네. 그런데..”


“천상에 계속 있으면, 아버지 얼굴이 생각이 안 날 것 같아요.”


연화의 손이 잠시 멈췄다. 원이는 아이였지만, 문을 ‘보는’ 아이였다.


“그랬구나.

우리 원이도 아버지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연화는 아이를 안았다.


“원아.. 여긴 잠깐 쉬는 곳이야.”


이승의 소식: 수리부엉이

어느 날, 수리부엉이가 다시 나타났다. 날개 끝에 천상의 빛과 이승의 어둠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연화 아씨.)


“말해다오.”


(이승에서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연화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방님은 괜찮으신 거지? 아버지도??”


(걱정 마셔요. 두 분 모두 살아 계십니다.)


연화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천상에서 처음 느끼는 통증 같은 감정이었다. 그날 밤, 연화는 어머니 앞에서 말했다.


“어머니.”


“더 이상 천상에서 머물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버지와 서방님이 애타게 저희를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구나.”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정말 괜찮겠느냐.”


“이승에 지금 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


연화는 품에 아이들을 안았다. 원이와 연이, 그리고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갓난아이. 천상은 안전하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그러나 연화가 선택한 것은 안락함이 아니었다.


“어머니.. 손녀딸 이름 좀 어머니가 지어 주셔요.”


“내가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


“네.. 그럼요.. 어머니 어머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면,

분명 이 아이는 어디서든 안전할 거어요.”


“그렇담..

守芽 수아가 어떠냐.”


“지킬 수, 아이아

지켜지는 아이, 수호받는 아이라는 뜻이다.”


“네. 어머니 너무 예쁜 이름이에요

수아...”


“수아.. 우리 수아야..

너의 이름은 외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거야”


“외할머니와 하늘이 너를 언제나 지켜줄 거야”


“그럼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만나러 가볼까?”


“연화야 지금은 안 된다.”

설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분명했다.


“오늘은 아니다.”

연화가 놀란 듯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만큼은
아무 경계도 넘지 말고,
아무 문도 들여다보지 말거라.”

원이의 손이 연화의 치맛자락을 더 꽉 붙잡았다.


“어머니 그럼 우리 아직 안 가는 거예요?”

원이가 연화에게 물었다.


“그래, 원아.”


“조금만 여기서 더 쉬자꾸나.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구나.”

원이의 얼굴에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스쳤다.


“그럼. 내일은요?”

연화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일은..”

말끝을 흐린 채, 연화는 꽃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직 문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주 멀리, 희미하게 이어진 기척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수리부엉이가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약속처럼 느껴졌다.


(내일, 다시 전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이 아이들에게 ‘안전한 밤’을 먼저 주거라.”

설화가 연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어머니.”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수아를 품에 안고, 원이의 손을 잡은 채 천상의 가장 조용한 꽃그늘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밤은 어둡지 않았다. 별이 뜨지 않아도, 잠은 깊이 찾아왔다. 연화는 마지막으로 속으로 다짐했다. 하룻밤. 딱 하룻밤만 더.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아이들의 체온을 되찾은 뒤, 그다음에야 문 앞에 서겠노라고. 그렇게 연화와 원이, 그리고 수아는 천상에서의 밤을 맞이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서둘러야 할 때도 있고, 한 걸음 멈춰야 할 때도 있다. 문을 열 수 있음에도 열지 않는 선택, 떠날 수 있음에도 하루를 남겨두는 용기. 그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고른 기다림이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이 반드시 미덕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람으로서 살며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분명 존재한다.

지금껏 저지른 죄들이 이승에서의 심판을 잠시 피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윤회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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