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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May 21. 2024

마흔여섯, 이제 죽기로 결심하다!

자포자기에서 자기포기로의 여정

열 살이나 되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4자성어를 모아놓은 작은 책이 하나 있었다. 손에 잡힌 김에 하나하나 읽어나가는데 유독 눈에 들어와서 잊히지 않는 한 단어가 있었다. 아마 이 단어가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4자 성어였을 것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


자포자기란 절망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를 읽어 내려가던 어린 나는 절망이 무엇인지, 사람이 살다가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자기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왜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발음을 해보니 '자포자기'. 입에 싹 감아지는 음가를 가진 것도 같고, 앞으로 누군가 힘든 사람을 만나면 '자포자기하지 마!'라고 말해 주며 잘난 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뇌리에 옮겨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권의 4자성어 책에서 우연히 건져 올린 이 한 단어 덕분일까? 

나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지만 절망에 이르지 않으려 애썼고 다행히 깊은 절망의 시절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싶은 우여곡절도 없었던 것 같다. 실망스럽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냐마는 생각을 고쳐 먹으려고 애쓰고 마음을 달래었을 테다. 때로는 굉장히 말 안 듣는 자의식을 달래 가며 일어나 걷다가 힘이 붙으면 뛰기도 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던 듯하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멋져 보였던 4자성어가 가장 오랫동안 나를 다독이는 데 쓰였던 것이다. 


"무너지면 안 돼!"

"후회해서도 안돼!"

"슬퍼하면 안 돼!"

"울면 안 돼!"

"일어나! 또 걸어가자!"

"주저앉아 있으면 어둠이 너를 삼킬 거야!"


인생에 일어나는 여러 모양의 선들과 여러 빛깔들을 담아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에 나를 포기했을 때의 나를 상상하며 절대로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살아왔다. 어쩌면 두려움으로 나를 길들이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상상 속의 두려움은 실제가 아니니까. 두려움은 더 비극적인 현실을 철저히 막아주는 매우 강력한 기제였던 것이다.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오춘기를 경험하는 것 같다. 사춘기의 질풍노도의 시기와 질적으로 다르지만 그만큼이나 강력한 사유의 시간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 어떻게 살까? 무엇을 향하여 살까?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답을 찾는 진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것 같다. 


요즘은 삶을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게든 찬사의 의미이다. 어떤 이의 삶이든 응원이 필요하고, 두루 모인 응원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 레이스를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설사 그가 잠시 앉아 쉬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몫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살다 느끼는 새콤달콤한 과일맛과 같은 경험도, 아카시아 향기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음미하게 하는 향긋함도 아름답다고 말해 주는 것이 아깝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바닷가 수산시장 생선 비린내와 같은 인생경험도 아름다움에 범주에 이제는 넣어주고 싶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 했던가? 인생의 쓴 맛도 호탕하게 아름다움의 범주에 담아두고 싶다. 아무리 좋은 것은 질리지 않으려면 다채로워야 한다. 인생의 여러 면모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 형용할 만한 것이 된다.


어떤 인생의 국면도 아름다워지기 위한 부단한 과정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자포자기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를 다스리던 그 시절의 나는 어쩌면 아름다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대신, 세상은 좀 위험해 보였고 어딘가 어둠의 손길이 나를 넘보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경험을 하며 내 삶을 그저 좋은 것들로 채워 내 인생의 그림을 그려가려 부단히 애썼던 듯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실패한다면? 예상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런 부정적인 가정들을 내게 들이대며 두려움과 불안으로 나를 성장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없는 이 위험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위험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나는 불안이나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 결과, 내 삶은 어느 정도의 안정적이고 안전한 궤도로 진입한 것 같다. 


안전하다는 느낌은 참 좋은 것이다. 편안함이나 안락함, 풍요를 연상시키는 단어이다. 하지만 안전은 평안이나 풍요와는 격이 달라서 그것들의 필요조건일지 몰라도 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안전한 삶의 궤도에 도달했지만 평안이나 풍요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나는 40대에 들어서서 안전하지만 불편한 삶을 산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짧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꽤 오랜 시간을 도대체 무엇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른 삶은 없을까?


현재의 나란 과거로부터 응축된 결정체이다.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언제 이렇게 컸나 싶게 급격한 변화를 느끼곤 한다. 그럴 때 나의 감탄의 언어를 들은 아이들은 내게 다가와 자기네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할 때가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엄마인 나는 아주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다. 거기에 아빠의 동조가 보태어지면 "제가요? 정말요? 그랬다구요? 하하하.. 진짜 재밌네요." 하며 이제는 자신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옛 모습을 남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받아들이곤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은 계속 변화한다. 변화가 싫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 분량만큼 타인이 그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나이 들어가면서 처해지는 상황과 맥락도 계속해서 변화하니 그에 맞추어 자연스럽고 더디게 사람도 변하는 것이 좋은 듯하다. 이제 좀 살만해졌다 싶어 졌을 때 멈춰 설 일이 아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변화를 거부할 일도 아니다. 


어쩌면 다행스럽게 나는 어렵사리 안전지대에 도착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고 그때부터 치열한 반문과 회의의 시간이 수년이 지났다. 더 이상 과거의 열정적인 성장과 도약 따위를 원하지 않는다. 좀 천천히 그러나 깊고 따뜻한 풍요와 성숙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러니 두려움으로 나를 채찍질하던 방식의 삶은 부대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포자기와 음가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단어를 찾았다. 

이번에는 '자기포기'이다. 


나의 나됨에 관하여 끈질기게 집착했던 자기중심의 권리와 자격을 모두 내려놓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좀 더 자극적인 말로 표현하면 '죽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제목인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와는 정반대의 표현이다.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극단은 서로 만나기도 한다. 매일을 죽기로 결심하는 나는 세상과의 관계 설정에서 지배하는 두려움과 불안의 자의식들을 모두 죽이기로 한 것이다. 창조주의 신실한 섭리를 기대하며 만물을 소생케 하는 그 섭리에 나도 일부임을 시인하며 자연스러워지기로 한 것이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이제는 자기포기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살아왔던 삶은 아등바등, 전전긍긍의 삶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는 삶은 오히려 넉넉하고 자유롭다. 나를 보지 않고 더 높은 곳에서 더 넓은 안목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 세상'만 살피던 나에서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의 사랑 안에 있는 나'를 바라보기에 다른 사람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세상이 그렇게 위험해 보였던 것은 각자 '자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해 보였기에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것이다. 시야가 바뀌면 나란 존재도 죽어도 괜찮은 일점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도 세상도 그저 점일 뿐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이제, 나는 날마다 죽고 천국에서 살고자 한다. 

천국은 죽기로 결심한 자들이 평안과 풍요를 경험하는 안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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