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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Jun 24. 2024

사랑한다는 것

40대 부부의 사랑 이야기

부부로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온 두 사람에게 서로 사랑한다는 걸 확신하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면 누군들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싶다. 누군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해 온다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우리 부부의 사랑이, 사랑 같기도 하고 의리 같기도 하여 묻는 사람의 의도를 헤아리며 답을 고민할 것 같다. 


물론 우리 부부에게도 불꽃이 튀는 열렬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 그때는 그런 사랑도 좋았다. 설렘과 계속되는 그리움이 없는 연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게 어느 날 신이 찾아와 설렘 속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사랑의 기회를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언컨대 주저 없이 사양할 것이다!!!


세월을 지나 보니, 설렘과 열정은 불확실한 길을 갈 때 안정감과 평안이라는 종착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필요한 땔감 같은 것들이었다. 괄목할만한 관계의 진전이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신체적 반응에도 모두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제는 내 생의 에너지 수준을 고려할 때 설렘과 열정이 필요한 사랑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신의 선물이라 해도 나는 사양할 것이다.


사랑 scene # 1


40대 중반의 나에게 지금의 사랑은 그저 휴식이고 안식으로 충분하다. 지난 주말에는 6월의 무더위를 깨고 비가 한껏 내려줬다. 날이 덥지 않고 햇살이 뜨겁지 않으니 비 오는 여름날의 산책은 우리 부부는 좋아한다. 더군다나 이제는 식후에 가만히 있다가는 슬슬 졸음 밖에 오지 않을 거라며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식후 산책을 나선다. 건강관리가 중요해진 중년의 부부가 된 것이다. 쏟아지는 빗속을 가르며 대형 골프 우산을 하나씩 받쳐 둘고 집 앞 호수 산책을 시작했다. 


화창한 날이면 해질 녁에 나가서 맨발 걷기를 자주 하는데, 비 오는 날의 맨발 걷기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호숫가에 접어들어 비로 흥건히 적셔진 땅을 보자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버린 채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중 맨발로 산책을 시작했다.


질퍽해진 땅을 밟을 때 속살을 슬그머니 파고드는 흙의 감촉에 기분이 참 좋았다.

"여보~ 어린애들이 물만 보면 첨벙거리며 뛰놀고 싶어 하는 기분이 이해가 되는데요? 정말 재밌네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사이 남편은 어느새 더 질퍽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그러네요. 참 재미있네요."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어린아이의 장난스러움이 보여 귀여웠다.


한 시간 남짓 질퍽거리는 땅을 맨발로 걸으며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그저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아이 셋 키우는 이야기들이었을 테고, 낱낱이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숨 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며 가벼이 살아가듯 우리 부부의 일상도 그런 작은 이야기들로 꾸며진다. 그저 그런 이 평온이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 소중한 시간을 늘 함께하는 사람이 남편이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유지된다는 것이 우리 부부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을 매일매일 입증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신이 내게 찾아와 열렬한 사랑을 선물한다 해도 나는 이 사랑이 좋아서 사양할 것이다.


사랑 scene # 2


오늘 아침에 시댁식구들과 함께하는 단톡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오늘 회사에서 공로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단톡방에 인증 사진으로 올라왔다. 물론 예정된 일정이었기에 나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부모님들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사로 느껴지셨을 테다. 자식이 아무리 나이 들어도 냇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는 그 마음은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이해된다. 시부모님의 축하메시지와 형님 내외의 축하 메시지가 다 끝나자 남편의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부모님을 보면서 컸고, 아내를 만나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소 언변이 없는 남편인지라 어느 자리든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남편을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그 모든 세월을 통틀어 가장 멋진 멘트로 기억할 만한 메시지였다.

남편의 감사인사와 형님의 감탄 메시지

부모님과 아내 모두를 존중하며 적절한 감사를 전한 것도 훌륭했지만, 아내인 나를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남편의 인사가 아주 오랜 세월을 지나 사랑에 대한 태도가 나와 같아졌다는 것이 내가 감탄한 이유였다. 


내가 남편과 결혼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는 이 사람 앞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른, 지금도 미숙하지만 그때는 더 미숙했던 시절이었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관계에서의 그 낯선 욕구가 싫증 내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용납하며 살아갈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확신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16년을 함께 살면서 남편이 빛나는 자리에 있을 때, 그의 언어에는 내가 원했던 사랑의 표현들이 고스란히 젖어 흘러나온 것이다. 부부가 되어 사랑을 한다는 건 참 오묘한 일이다. 감정을 넘어서고 신뢰의 터널도 지나 드디어 인생의 든든한 동역자이자 상호보완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에 이른, 우리 부부의 사랑은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느낌이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최선을 다할 때 남편에게서 힘을 얻으며 살아왔다. 남편 역시 자기 삶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아내인 나에게서 에너지를 충전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우리 부부는 지금껏 서로에게 충전소가 되어 살아온 듯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오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싶다. 오늘 남편은 시댁식구들이 모두 함께 하는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은밀하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어로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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