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브라운 운동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물 흘러가듯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의식의 흐름' 이라고 말입니다.
'의식의 흐름' 이라는 표현은 1890년 윌리엄 제임스라는 심리학자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식, 생각은 끊임 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이란 걸 부각한 표현입니다.
이후 '의식의 흐름'은 심리학을 넘어 문학 작품의 중요한 서술 기법으로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사유 과정을 강물의 흐름으로 형상화해서 이해하려는 시도인데, 그럴 듯합니다.
어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연상케 하고, 그게 또 다른 걸 연상시키고, 이렇게 연상작용이 연쇄작용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사고의 방식은 '흐름' 으로 느껴질 법 합니다.
그런데요, 의식은 정말 물 흘러가듯 '흐르는' 걸까요?
'의식의 흐름'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문학 작품이 영국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입니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이죠.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 등 여러 인물의 머릿속을 드나들며 그들의 '의식의 흐름' 을 어렵게, 어렵게 따라갑니다.
그런데 율리시스를 분석하는 평론가들의 서평을 보면, 인물들의 의식 과정을 흐름으로 규정하면서도 '파편화', '비선형적', '얽히고 설킴' 등의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 을 말할 때, 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 윌리엄 포크너의 <The Sound and The Fury>(소리와 분노, 혹은 음향과 분노) 에서도 등장 인물들의 생각과 기억의 과정을 따라가는 상황은 흐른다기보다는 꺾이거나 건너 뛴다는 게 더 어울릴 듯합니다.
'흐름', 어딘가로 흘러간다는 것은 비선형이 아닌 '선형'의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다는 거죠. '선형의 흐름' 은 3차원적이지도 않습니다.
'흐름'은 또 단면이나 마디, 분절이나 꺾임, 부딪힘이나 끊김도 없이 그냥 내내 일정하게 죽 이어지기만 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과정을 좀 더 찬찬히, 아주 가만히, 잘 되짚어봅시다.
그러면 이게 꼭 물 흐르듯, 선형으로 끊김없이 흘러가지만은 않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생각이란 게 때로는 잠시 멈추기도 하고, 갑작스레 다른 게 떠오르다가 어느찰나에 엉뚱한 쪽으로 꺾이기도 하고, 비논리적으로 건너 뛰기도 하고, 지금 연상되는 게 또 다른 기억과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합쳐져 나가기도 하고, 튕겨나가기도 합니다.
생각, 혹은 의식의 움직임은 특정한 방향성도 없는 듯합니다.
우주 공간처럼 모든 방향을 향하기도 하고 모든 방향에서 오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하고 응축되기도 하는 것이죠.
생각, 혹은 의식은 그래서 선형의 흐름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좌충우돌' 하는, 아주 불규칙한 비선형 형태에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1827년, 로버트 브라운이라는 식물학자가 발견한 '브라운 운동' 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액체나 기체 등 '유체' 에서 아주 작은 입자들이 유체의 분자들과 충돌하면서 불규칙하게 운동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브라운은 물 표면에 떠 있는 꽃가루의 불규칙한 움직임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이 현상을 파악했습니다.
브라운 운동은 이후 아인슈타인이 원자나 분자 등 '입자의 확산 운동' 으로 발전시켰고 위너라는 학자가 '확률과정' 으로 모형화하기도 했습니다.
양자역학 등 과학에서는 물론 주식시장의 주가 동향 같은, 인간을 둘러싼 여러 불규칙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 입자들, 혹은 공기 중을 떠도는 어떤 성분의 원자들은 끝도 없는 브라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 부딪치고 저리 튕기고, 90도로 꺾였다가 180도로 돌아서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꽃가루의 쉴새없는, 그리고 끝없는 좌충우돌'.
그래서 생각, 사고, 사유, 사색, 의식의 움직임은 '흐름' 보다는 '브라운 운동' 과 더 닮은 모습으로 연상됩니다.
그래서 저는 '의식의 흐름' 보다는 '의식의 브라운 운동' 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유체나 공기 속 입자처럼 방향성이나 규칙도 없이 무한대로 거듭되고 확산하는 '의식의 브라운 운동(Brown Motion of Consciouness)' 말이죠.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제 글쓰기도 '의식의 브라운 운동' 을 기록하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주변의 사물, 주위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 이웃의 사소한 이야기, 읽은 책, 본 영화, 들은 노래 한 구절, 사진 한 장, 다닌 곳, 거닌 길, 걸으면서 봤던 나무 한 그루, 그 옆의 꽃 한 송이, 문득 바라본 창밖 풍경, 문득 떠오른 상념.
또 오늘 벌어진 사건과 사고, 언론에 보도된 사회적 이슈와 문화적 현상, 요즘 트렌드, 방금 알게 된 상식이나 지식, 친구에게 들은 우스개 한토막, 그리고 자기가 주인인 줄 아는 우리 집 반려견의 행동 하나까지...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이 관찰과 사색의 대상이자 사유의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소재들은 모두 끝없이 좌충우돌하며 확장해가는 브라운 운동의 입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식의 브라운 운동은 실제 물리적인 브라운 운동과는 결과가 달라야겠습니다.
물리적인 브라운 운동은 사실 도착지라든가 결과물이라든가 하는 '끝'이 없습니다. 영구적으로 반복되는 운동이죠.
그러나 '의식의 브라운 운동'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꺾이고 튕기고 부딪히고 합쳐지는 좌충우돌 사유의 과정 끝에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글쓰기는 그래서 의식의 브라운 운동 과정과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의미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써나갈 제 글쓰기의 가장 첫 번째 글을 '의식의 브라운 운동'으로 삼은 이유입니다.
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자칫 모호한 낙서로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알아주는 이가 몇 안 될 수도 있겠고요.
그러나 한 두명만 고개를 끄덕여도 글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 세상에 아주 작은 영향이라도 주는 것이니까요.
아침 햇살 속에 들리는 작은 새 한 마리의 작은 지저귐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