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의 역설
'제 친구'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죠.
직장에서 곤란한 일이 생겨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참 고되고 지칠 때였다고 합니다.
밤늦게 힘겨운 발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열자 여섯 살 딸, 다섯 살 아들, 두 아이가 환한 웃음과 함께 율동과 노래로 반기더랍니다.
아이들 입에서 힘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한편으론 당연히 힘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힘이 쭉 빠지더랍니다.
'느그들 때문에 이 고생이다. 녀석들아! 허허...'
'애들만 아니라면 다 때려치우고 저 어디론가 떠나 아무 일이나 하며 살 텐데...' 하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스치더랍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 다시 말하지만 절대 제 얘기가 아니라 제 친구 얘기입니다.
그런데 "힘내세요!"라는 응원의 말이 진심으로 부담이 되는 경우도 없진 않을 듯합니다.
회사의 정리해고가 일방적으로 강행돼 노사 갈등이 극심해진 기업이 있었습니다.
해고 노동자 몇 명이 이 회사 공장의 높은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 장기간 농성에 들어간 상태였죠.
악조건 속 고공 농성이 길어지면서 이들의 심신은 지쳐만 갔습니다.
체력적으로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질 무렵, 노조 내부에서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고 내려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엄마나 아빠, 남편이나 아내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함도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도중... 한 노동단체에서 굴뚝 앞으로 격려 방문을 온 것입니다.
"동지들 투쟁을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등등의 피켓들을 들고서 말이죠. 굴뚝에 올라 있는 노동자들은 아래에 격려방문 온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며 '더 힘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공 농성은 한동안 더 계속됐습니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다 내려놓고 편히 좀 쉴까?' 할 때마다 '힘을 내라'는 격려와 응원이 찾아들었습니다.
결국은 그 격려와 응원이 고난의 고공농성을 하염없이 계속하도록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격려와 응원의 '힘'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저항과 투쟁에 나선 이들의 목숨을 건, 절실한 의지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때로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제삼자들이 웃으며 던지는 '힘내라'는 한마디가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설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한 방송국 특집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도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반드시 의대에 보내려고 하고, 아들은 어머니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상황. 3수 끝에도 결국 의대에 떨어지자 아들은 말없이 잠적해 버립니다.
부모의 걱정이 극에 달할 때 아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겁니다.
"엄마, 여행을 좀 다니는 중이에요 며칠만 더 바람 쐬다가 갈게요."
안도한 어머니는 흔쾌히 그러라며 아들을 다독이면서 '따뜻한 격려'의 말도 덧붙입니다.
"그래, 아들! 너무 고생했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다가 와. 그런 다음에 우리 더 힘내서 내년에 다시 한번 해보자!, 넌 할 수 있어. 난 우리 아들을 믿어!"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집니다. 호흡조차 힘겨운 듯 고통에 일그러진 아들의 얼굴로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수능시험이 코앞이네요.
시험장으로 향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요?
또 할아버지나 할머니, 친지 등 가까운 사람들은 뭐라 격려와 응원을 할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이런 조사가 있었습니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이 부모로부터 듣지 않았으면 하는 말은?
'혹시 우리 엄마 아빠가 이 말을 할까 봐 좀 걱정됐다'라고 수험생들이 1순위로 꼽은 말입니다.
부모가 큰 일을 앞둔 자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고 당연히 할 수 있는 격려인데, 이게 왜 피해야 할 말이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초조하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조바심 나는 심리 상태일 때 '너의 능력을 믿는다'는 격려는 '내가 부모의 믿음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넌 할 수 있어", "넌 잘할 거야", "넌 반드시 해 낼 거야", "잘할 수 있지?" 같은 격려도 '난 널 믿는단다'와 비슷한 말들이죠.
기대감을 극대화한 표현들이죠, 할 수 있다는 말, 반드시 해낼 거라는 말은 '반드시 결과가 좋아야 한다'는 압박감만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시험장을 향하는 아이의 발걸음에, 이런 말들이 과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런 말들은 이제 상투적인 느낌마저 들어 진정성도 좀 떨어지게 들립니다.
시험장 정문 앞에서 아이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은데 딱히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적잖은 부모들이 많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도 수험생에게 피해야 할 조언으로 꼽혔습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도 있듯이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게 인간의 의식입니다. 긴장하고 있는 아이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긴장할 수 있습니다.
'긴장하지 말라'는 말 말고도, 시험 보는 자세에 대한 뻔한 조언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실수하면 안 돼" 등등.
최선을 다 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건 수험생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 잘 읽어!", "마지막에 문제 한 번씩 꼭 다시 봐봐!", "수험번호 틀리지 않게 체크 잘해!"
설마 이런 구체적인 코치까지 하는 부모는 많지 않겠죠? 이런 말들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들입니다. 아니, 하지 않아야 할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수능일 전날 저녁이나 시험 당일 아침, 시험장 앞에서 무슨 말들을 해줘야 할까요?
시험 전날과 당일 아침 식사, 도시락은 평소 먹던 것들이 가장 좋다고들 합니다. 복장이나 필기도구도 평소 입던 대로, 평소 쓰던 것들로 하라고 하죠.
수능일이 긴장하고 초조해야 할 아주 특이한 날이 아니라 평소의 감정을 유지해야 할 평범한 날로 여기도록 하는 게 좋다는 얘기입니다.
응원과 격려도 마찬가지이겠죠.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평소에 매일같이 그런 응원의 말들을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별 일 아니라는 듯,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는 느낌의 무언의 응원과 격려가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평소처럼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죠.
준비물과 내일 입을 옷을 함께 챙겨주는 정도가 부담을 주지 않는 힘이 돼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 격려의 말없이 시험장에 들여보낸다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 허전하다면 "그동안 고생했다!",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정도는 어떨지요?
물론 지금까지 쓴 내용이 모든 수험생에게 적용될 수는 없겠습니다. 수험생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난 널 믿는다, 힘내, 넌 할 수 있어, 넌 잘할 거야'라는 말들에 실제로 힘을 얻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평소 애정 표현을 잘하지 않은 무뚝뚝한 아빠라면 너무 진지하지 않게 "힘내라!" 한마디 해주는 게 아이의 긴장을 풀어줄 수도 있겠지요.
지금까지 읽으신 내용은 지금은 어른이 된 두 아이에게, 가끔씩 '널 믿는다, 힘내라'라고 말해왔던 한 아빠의 후회 섞인 글이었습니다.